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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세계사 137회 줄거리 《1,368억! 뭉크의 절규, 무엇이 그를 미치게 했나?》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2. 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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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거벗은 세계사 137회에서는 뭉크 이야기를 합니다. 2008년 5월 6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인상주의 대표 화가 모네의 '아르장퇴유 철교' (1873년 作)가 약 4,148만 달러(한화로 약 424억 원)에 낙찰된다. 2010년 5월 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피카소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1932년 作)이 약 1억 650만 달러(한화 약 1,167억)에 낙찰된다. 2012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뭉크의 《절규》(파스텔 ver.)가 약 1억 1,990만 달러(한화 약 1,368억 원)에 낙찰된다.

 

 

1,368억! 뭉크의 절규, 무엇이 그를 미치게 했나?

 

에드바르 뭉크 (1863~1944)
'표현주의'의 창시자
피카소와 더불어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화가

 

| 죽음과 불안 속에서 자란 뭉크의 유년 시절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뭉크가 5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뭉크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상처를 오랜 시간 동안 극복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다정했던 아버지는 종교의 광신도가 되었다.

 

Q. 몽크의 아버지는 밤마다 이 행동으로 자녀들을 겁에 질리게 했는데요, 뭉크를 환각과 악몽에 시달리게 한 이 행동은 무엇일까요? 밤마다 아이들에게 공포 소설을 읽어주었다.

 

 

 

뭉크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학대를 했다. 뭉크는 어린 시절 공포에 사로잡힌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877년 뭉크가 아끼고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15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똑같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뭉크는 17살에 미대에 입학한다. 1889년 25살이 된 뭉크는 첫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뭉크에게 큰 영향을 준 화풍은 후기 인상주의였다. 특히 반고흐를 좋아했다.

 

후기 인상주의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생
사실적인 묘사를 거부
화가 스스로 빛과 색을 새롭게 해석

 

1889년 11월에 뭉크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뭉크는 실의에 빠지고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뭉크 스캔들'

파리 유학 생활을 마친 뭉크는 28살에 화가의 추천으로 베를린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된다.

Q. 1892년 11월 뭉크는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지만, 일주일 만에 중단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엄청난 혹평에 시달려서

 

시대에 맞지 않았던 뭉크의 작품에 비난이 쏟아졌다. 독일은 당시 모더니즘 화풍의 미술 발전이 더뎠던 지역으로 독일 미술계는 뭉크의 작품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술 협회에서 회원들의 투표로 전시회를 중단했는데 찬성이 120표 vs 반대가 105표가 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혁신적인 신진 화가들이 모여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고 제도권 미술로부터 탈피하는 의미로 집단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베를린 분리파
전통적인 아카데미 형식에서 분리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추구

 

뭉크는 이 사건으로 스타 화가로 등극하게 된다.

 

《절규》를 둘러싼 미스터리 ① 절규의 이유

뭉크가 해질녘에 산책을 하다가 그 감정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아낸다. 

 

해가 질 무렵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빨갛게 변했다. 극도의 피로를 느낀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불의 혓바닥과 핏물이 검푸른 피오르 해안을 따라 퍼져 갔다. 내 친구들은 공포에 몸을 떨며 뒤처진 나를 남겨두고 계속 걸어갔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무한한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절규》를 둘러싼 미스터리 ② 실존하는 배경의 비밀

뭉크는 에케베르크 언덕을 배경으로 《절망》, 《절규》, 《불안》을 그렸다.

Q. 뭉크는 《절규》의 배경이 된 에케베르크 언덕을 강박적으로 계속 그렸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케베르크 언덕이 가족의 장례식을 한 곳

 

에케베르크 언덕에서 뭉크의 어머니, 누나,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절규》를 둘러싼 미스터리 ③ 100년간 숨겨진 비밀 낙서

뭉크가 《절규》에 한 낙서

 

190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전시 중에 발견된 낙서를 사람들은 뭉크를 싫어하는 관람객이 작품을 훼손하려고 써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2021년 필체를 대조해서 낙서의 범인이 밝혀지는데 뭉크 본인이었다.

 

Q.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던 뭉크는 작품이 팔릴 때마다 이 행동을 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는데요, 어떤 것일까요?
그림이 팔려도 다시 그려서 소장한 것

 

《절규》도 약 30개의 버전이 남아있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이 팔리는 걸 싫어했는데 심지어 팔린 그림이 너무 그리워서 다시 빌려오기도 했다. 

 

| 《절규》 도난 사건

1994년 2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있던 절규가 사라진 것이다. 범인들은 사다리를 가져와 창문을 깨고 들어가 와이어를 끊고 그림을 훔쳐간다. 경찰은 뭉크의 그림을 찾는 부호가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절도 주범 폴 엥거를 검거한다. 

 

2004년 8월에 두 번째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대낮에 복면을 쓴 남자 두 명이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을 습격해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훔쳐간다. 노르웨이 갱단의 소행이었다. 2년 만에 경찰은 범인을 검거하고 작품을 되찾는다. 갱단의 두목이 자신의 사면을 거래하기 위해서 훔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지금까지도 작품이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뭉크를 미치게 만든 연인 ① 유부녀 밀리 타올로브

첫 번째 연인은 3살 연상 밀리 타울로브였다. 1885년에 뭉크가 가족과 방문한 휴양지에서 그곳에서 운명처럼 밀리 타울로브를 만난다. 그녀는 사교계를 주름잡던 셀럽이었고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1891년까지 약 6년 동안 불륜관계를 이어갔다. 

 

밀리가 이혼을 하고 자신에게 올것이라 생각했던 뭉크는 이혼한 밀리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걸 보게 된다. 뭉크는 이때부터 여성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흡혈귀》라는 작품에서 뭉크는 여성이 쾌락을 주지만 동시에 고통을 주는 존재로 표현한다.

 

뭉크를 미치게 만든 연인 ② 다그니 율

먼 친척 관계였던 다그니 율을 베를린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뭉크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뭉크의 친구인 남자와 결혼을 한다. 뭉크는 《마돈나》 작품에서 다그니 율을 그리는데 여성을 성녀이자 남성을 파멸시키는 메두사로 표현했다. 

 

뭉크를 미치게 만든 연인 ③ 스토커 '툴라 라르센'

1898년 29세 툴라와 만난 34세 뭉크. 툴라는 와인 수입상의 딸로 부유한 집안에 아름다움까지 겸비했다. 뭉크가 자신과의 결혼을 미루자 툴라는 스토커가 되었다. 《마라의 죽음》에서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남자가 뭉크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여성이 툴라이다.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는 뭉크에 툴라는 총을 들고 가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몸싸움을 하다 총이 발사되고 뭉크의 손가락에 총알이 박힌다. 그래서 뭉크는 가운데 손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Q. 당시 자신의 정신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뭉크는 이것을 결심하는데요, 어떤 일일까요?
정신병원에 입원

 

뭉크는 43세에 코펜하겐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오슬로 대학 설립 100주년 벽화 공모전에 참가해 《태양》이라는 작품을 남긴다.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더 유명하다고 합니다.

뭉크 《태양》

 

뭉크는 오슬로 외곽 에켈리에서 은둔하며 작품 활동에만 매진하며 지냈다. 

 

Q. 1937년 뭉크는 이 사람의 타깃이 되면서 그의 작품들이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는데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틀러

 

뭉크는 1933년 나치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된다. 히틀러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을 선호해 뭉크 같은 표현주의 미술은 퇴폐적이라고 비난했다. 나치 정부는 압수한 현대 미술품을 모아두고 작가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작품을 소각하거나 경매를 통해 현대 미술 작품을 매각해 전쟁 비용으로 사용했다.

 

1940년 노르웨이까지 침공한 나치를 본 뭉크는 나치에게 작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오슬로 시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남기겠다는 유서를 작성한다. 오슬로 시는 뭉크의 그림과 소장품 2만 8,000여 점을 소유하게 된다. 

 

뭉크는 80세인 1944년 1월 23일 폐렴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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