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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그리고 교양

벌거벗은세계사 141회 '북유럽의 침략자 바이킹은 어떻게 유럽을 휩쓸었나?'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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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141회

'북유럽의 침략자 바이킹은 어떻게 유럽을 휩쓸었나?'

 

바이킹 시대
8세기 말 ~ 11세기말까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서 바이킹이 활동한 시기

 

| 극한의 땅에 등장한 강력한 바다의 전사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지역의 사람들을 칭하는데 8~11세기 이들에게 약탈을 당한 유럽인들은 훗날 고대 노르웨이어인 침략자 뜻인 바이킹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 바이킹이 강력했던 이유 

① 우월한 신체 조건

키와 몸집이 커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바이킹을 더욱 강인하게 보이게 했던 것이 바로 수염이었다. 수염은 바이킹 사회에서 힘과 권위를 상징했다. 

②척박한 환경

스칸디나비아는 산지로 농경이 쉽지 않았고 겨울에는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Q. 일부 바이킹 집단에선 아들이 태어나면 침대밑에 이것을 놓는 풍습이 있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이킹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투를 했다. 이유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다. 결투에서 승리하면 이긴 사람이 옳은 것으로 판결되어 패배자에게 몸값 요구 및 재산 몰수를 할 수 있었다. 결투하다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만약 결투 신청을 받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겁쟁이로 낙인이 찍혀 추방당했다. 

 

| 죽음도 두렵지 않은 이유!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에서 전사의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오딘이 바이킹 전사들을 아스가르드로 인도하는 신이라면 토르는 바이킹을 돌보는 강력한 신이었다. 

 

바이킹은 지역별로 강한 전사를 부족장으로 삼아 스칸디나비아 곳곳에 정착했다. 그러던 중 8세기에 극한의 땅 스칸디나비아 너머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 바이킹의 역사를 바꾼 롱십의 발명으로 이루어진다.

 

중간 롱십의 길이는 약 30m, 승선 인원은 약 70여 명이었고 최대 속력은 약 22km/h 이상이었다. 당시 지중해의 배에 비하면 2배 정도 빠른 배였다. 그리고 유선형 선체로 저항을 줄여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었으며, 얇은 참나무를 겹 붙이는 독특한 제작 방식으로 가벼운 무게가 특징이었다.

 

그리고 다른 배와는 달리 갑판과 선실이 없어 더 가벼웠다. 그래서 바이킹은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롱십을 자유롭게 대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바이킹은 바다와 육지를 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바이킹 시대의 서막

당시 기독교가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유럽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수도원에 많은 기부를 해 수도원에는 많은 보물이 쌓이게 되었다. 

 

섬나라 잉글랜드는 내륙보다는 해안이 더 안전하다고 믿었고 부유한 수도원들이 주로 해안가에 세워졌다. 바이킹에게 잉글랜드 수도원은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바이킹은 793년 6월 잉글랜드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습격한다. 바이킹은 수도사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린디스판 수도원을 샅샅이 뒤져서 돈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수도원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바이킹은 잉글랜드를 넘어 서유럽의 수도원까지 약탈한다. 

 

Q. 바이킹이 금과 은, 보석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약탈품이 있는데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

 

바이킹은 수도사와 수녀는 물론 인근 마을 주민까지 무차별적으로 납치했다. 바이킹은 유럽 곳곳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여러 노예 시장에 팔며 큰돈을 벌었다. 

 

| 전설의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바이킹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대표적인 왕이다. 그는 가까운 나라인 잉글랜드를 노리는데 그곳에는 앵글로-색슨족이 살고 있었다.

 

 

 

앵글로 - 색슨족
서기 5세기 브리튼에 이주한 게르만족의 일파로 앵글로족과 색슨족을 의미함

 

당시 잉글랜드는 7개의 왕국이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었다. 라그나르가 처음으로 지목한 땅은 동부에 위치한 노섬브리아였다. 잉글랜드를 침략한 라그나르는 잉글랜드에서 사망한다. 노섬브리아를 약탈하러 간 라그나르는 태풍에 휩쓸리게 되는데 겨우 살아남아 노섬브리아의 해안에 도착한다. 이때 바이킹을 증오하던 노섬브리아 왕에게 붙잡힌 라그나르는 잔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Q. 뱀굴속에서 죽어가던 라그나르가 노섬브리아 왕에게 남긴 유언은 무엇일까요? 아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 라그나르의 죽음이 불러온 피의 복수극

무장한 수천 명의 바이킹은 노섬브리아 왕국 공격을 감행한다. 바이킹은 무기 제조 기술이 뛰어났으며 강력한 전사 베르세르크가 있었다.

 

베르세르크
곰 가죽을 뒤집어쓴 바이킹의 강력한 전사들

 

당시 잉글랜드에는 정규군이 없어 농부들이 징집되어 전쟁에 투입되었다. 바이킹 군단은 베르세르크를 앞세워 왕국을 점령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노섬브리아 왕을 생포한다.

 

Q. 노르웨이 기록에 따르면, 이바르는 아버지를 죽인 노섬브리아 왕에게 '피의 독수리' 형을 내렸는데요, 이것은 어떤 형벌일까요? 산채로 난도질을 하고 두 팔을 벌려 매달았다.

 

이바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잉글랜드 왕국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바르는 자신이 정복한 왕국에 꼭두각시를 세우고 세금을 거둬들였다. 

 

| 바이킹 침략의 나비효과 '잉글랜드 왕국'의 탄생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7개로 나눠져 있던 잉글랜드는 바이킹과 싸우면서 하나의 잉글랜드라는 의식이 형성된다. 이후 100년간 바이킹과 잉글랜드에서 공존하다가 군대를 정비해서 바이킹 세력을 잉글랜드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927년 과거 7개였던 왕국을 통일하여 잉글랜드 왕국을 세웠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거친 바다를 건너 무려 약 1,000km를 항해한 바이킹은 화산과 얼음의 섬 아이슬란드를 발견한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며 빠르게 적응한다. 정착한 지 50여 년 만에 약 1만 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한 바이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섬 그린란드에 도착한다. 그린란드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0% 이상, 천연가수 30%가 매장된 보물 같은 섬이다. 

 

Q. 바이킹은 얼음섬에 '초록의 땅'이라는 뜻의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린란드를 살기 좋은 땅이라고 속이기 위함

 

이 말에 속아 많은 바이킹들이 그린란드로 이주했다. 당황했던 바이킹들은 곧 적응해서 정착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인류는 바이킹이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도착에 비하면 약 500년 앞선 1,000년경에 벌어진 대사건이었다.

 

 

 

또 다른 땅을 찾아 서쪽으로 향한 결과 지금의 캐나다 동부 지역에 도착한다. 바이킹은 자신들의 종착지를 만들고 빈란드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사실이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나다 동부 해안에서 바이킹의 유물과 정착지가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동쪽으로 향한 바이킹은 유럽의 강줄기를 따라 내륙으로 뻗어나갔다. 유럽을 넘어 중동으로까지 무역로를 넓히는 데 성공한다. 스웨덴 바이킹은 이 무역로를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바그다드가 위기에 빠지면서 교역을 못하게 된 바이킹은 이슬람교도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몽골의 침략 전 무서운 침략자로 중동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에 바이킹은 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우기도 한다. 그 지역은 지금의 키예프루스인데 러시아 제국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 유럽의 역사를 바꾼 바이킹의 세력 확장

바이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력 확장을 위한 야욕을 드러낸다. 유럽의 강국인 프랑크 왕국을 공격한 것이다. 

 

프랑크 왕국
481년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세운 왕국으로 이후 분열되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기반이 되었다.

 

Q. 수십 년간 바이킹과 싸우던 프랑크 왕국의 왕은 바이킹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한 가지 대책을 마련했는데요. 무엇일까요? 바이킹 수장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왕국 북부의 땅을 수여

 

그 대신 그곳에 살며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 바이킹 시대의 정점 '크누트' 등장

크누트는 잉글랜드 왕국과 싸워 승리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크누트는 바이킹으로서 잉글랜드 왕위까지 차지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노르웨이, 잉글랜드, 덴마크의 왕 자리에 오른다. 이후 크누트가 사망하고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하느라 북유럽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가 후계자도 없이 사망하게 된다. 그러자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시작된다. 

 

|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바이킹 왕좌의 게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바이킹의 후예)

vs

잉글랜드 백작 해럴드 2세 (바이킹 혼혈)

vs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정통 바이킹)

 

 

잉글랜드 왕좌를 자치한 사람은 해럴드 2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는 잉글랜드로 쳐들어온다.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은 해럴드 2세였다. 이때 노르망디의 윌리엄 1세가 약 1만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가 벌어진다.

 

헤이스팅스 전투 (1066년 10월 14일)
영국 남동부 헤이스팅스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와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가 맞붙은 전투

 

해럴드 2에서는 노르망디 전사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최종 승자는 노르망디 윌리엄 1세에게 돌아간다. 이로써 잉글랜드를 오랫동안 지배하던 앵글로색슨족의 왕조가 몰락하고 윌리엄 1세가 세운 새로운 노르만 왕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바이킹은 기독교와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며 깊이 동화되어 바이킹의 대외 활동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8~11세기 약 300년간 유럽을 휩쓴 바이킹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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