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184회
'뻘밭에서 2천조의 땅으로! 세계 경제의 상징 맨해튼'
| 미국 경제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도시
맨해튼은 서울의 1/7밖에 안 되는 작은 땅에 16세기까지 불모지에 불과했다. 1524년 프랑스 배조차 그냥 지나칠 정도로 별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맨해튼 일대는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습지로 대부분 진흙으로 이루어진 뻘밭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 설립된 다국적 기업으로 최초의 주식 회사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 아시아 항로를 찾았다. 이 배를 이끌었던 선장은 영국인 선장 헨리 허드슨이었다. 오늘날 맨해튼 일대를 유람선 위에서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허든슨강은 헨리 허드슨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에는 유럽 귀족들이 주로 먹는 값비싼 굴이 널려 있었고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던 동물의 모피와 가죽이 널려있었다. 당시 유럽은 뛰어난 보온 효과의 비버 가죽을 최고급으로 쳤는데 맨해튼은 비버의 서식지였다.
원주민들은 비버 가죽을 싸게 거래한 뒤 유럽에 비싼 값에 팔기 시작했다. 가죽 거래처 맨해튼에 대해 네덜란드의 태도가 달라지는데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맨해튼에 다른 속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무역 및 식민지 건설을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1626년 맨해튼 남단에서 원주민과 거래를 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는 원주민들에게 맨해튼 땅을 당시 60 길드 현재가치로 약 160만 원에 구입한다. 네덜란드는 화폐 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에게 가치 없는 물건과 맨해튼 땅을 맞바꾼다.
오늘날 2,000조 원인 맨해튼 땅값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산 수준이다. 현재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맨해튼 남단을 차지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맨해튼을 뉴암스테르담이라 불렀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차례로 습격해 여성과 어린이를 무참히 살해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맨해튼을 해상무역의 거점이자 완벽한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 맨해튼은 어떻게 세계 경제 중심지가 되었나?
① 해상 무역 거점
맨해튼은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는 물론 네덜란드풍의 건물이 들어섰다. 게다가 맨해튼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민까지 장려했다.
무역 거점인 맨해튼을 노리던 국가가 있었는데 네덜란드와 해상 패권을 가지고 다투던 영국이었다. 그러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영란 전쟁이 발발한다.
영란 전쟁 발발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해상 패권을 두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왕국(영국)이 맞붙은 총 네 차례의 전쟁
이 전쟁을 틈타 영국은 맨해튼을 빼앗으려 군대를 움직였다. 이에 네덜란드는 경계선에 약 800m에 달하는 길이의 울타리를 설치했다. 이런 대책은 의미가 없었는데 영국이 일격을 가한 곳은 내륙이 아닌 앞바다였기 때문이다.
결국 네덜란드는 맨해튼을 포함 자신들의 식민지를 전부 넘겨야 했다. 조약을 체결한 영국은 사탕수수의 산지인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넘긴다.
영국을 막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는 철거 후 도로가 형성되었는데 그 길이 지금의 월스트리트이다.
월스트리트
미국 뉴욕시 맨해튼 남부에 위치한 금융가 wal(성벽)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
Q. 월스트리트에 금융 거리를 형성하게 한 최대 시장은 무엇이었을까요?
노예 시장
영국은 북미 식민지와 유럽, 카리브해를 연결하는 중간 무역지로 맨해튼을 활용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월스트리트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1711년 항구 옆에 있는 월스트리트에서 합법적인 시립 노예 시장까지 형성되었다.
뉴욕시는 노예는 물건이기에 세금을 부과했다. 노예는 재산으로 인정돼 담보물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농장주는 노예를 구입 후 노예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것이다.
오늘날 금융의 기본인 대출은 노예 시장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
1775년 미국은 독립 전쟁을 선포한다. 독립 선언 후 영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약 7년여의 전쟁 끝에 영국 식민지 중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신생 독립국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맨해튼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전쟁 중 중단됐던 무역을 재개했다.
Q. 주욱 황후호는 미국에서 재배한 이것을 거래했는데요. 당시 중국에서 비싼 값에 팔리던 이것은 무엇일까요?
중국에서 귀한 약재로 사용한 '인삼'
| 맨해튼의 경제적 기반을 받쳐줄 금융 기관 설립
맨해튼 최초의 상업은행이 설립되다. 뉴욕 은행 설립에 자금을 지원했던 인물이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뉴욕은행은 미국 정부에 대출을 제공해 주고 하원의원들에게 급여가 지급되었다. 당시 뉴욕은행은 정부를 대신해 사업을 책임졌다.
당시 뉴욕에는 증권 거래는 가능했지만 거래소가 없었다. 길가나 카페에서 증권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은 거래가 다반사였다.
1792년 5월 17일 맨해튼에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이게 바로 당시 월스트리트 40번지 2층에 세워진 뉴욕증권거래소의 전신 뉴욕증권거래위원회였다.
② 이리 운하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의 가장 큰 토목 공사가 이리 운하이다. 1825년 이리운하를 이용한 승객은 약 40,000명이었고 배 13,110척이 이동했다. 이리 운하로 운송비가 1/20로 낮아진다. 미국 중서부의 곡물들이 맨해튼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로써 맨해튼은 미국의 무역 요충지가 되었다. 맨해튼은 1800년 미국 내 해외 무역량은 단 9%에서 1860년 해외 무역량의 62%를 차지하는 항구도시로 우뚝 서게 된다.
Q. 바쁜 경제 활동으로 끼니를 챙겨 먹기 힘든 맨해튼 사람들을 위해 거리에는 이 노점상이 생겼는데요. 무엇을 팔았을까요? 굴
19세기 중반에는 전 세계 굴 채취량의 과반수를 차지하던 맨해튼에서는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굴 노점상이 생겼다. 당시 굴 소비량은 하루 약 100만 개에 달했다.
③ 유대계 금융 거물
유대계 거물들에 의해 맨해튼에 탄생한 세계적인 투자은행은 2000년대 중반 세계 4위 투자 은행으로 꼽힌 '리먼 브라더스'이다.
엠마누엘 리먼과 마이어 리먼은 첫째 형 헨리 리먼의 잡화점을 같이 운영했다. 이 잡화점은 결제 수단으로 면화를 받았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 면화의 가치는 백색황금으로 취급되었다. 리먼 형제는 면화 농부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출금의 담보는 면화를 받았다.
리먼 형제는 면화 농부와 수출업체 사이를 중개하는 뉴욕 면화 거래소를 설립한다. 리먼 브라더스를 금융회사로 전환시킨 인물은 필립 리먼이다.
필립 리먼
회사가 자본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주식 발행이 가능하다는 걸 최초로 인식한 금융가
필립 리먼의 지휘아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로 전환되었다. 리먼 브라더스는 월스트리트에서 철도 채권 발행을 주관하게 되었다. 철도 사업의 자금 조달 계획을 세우는 현대 금융 기업과 같은 역할을 했다.
유대인이 세운 또 다른 은행은 2023년 투자 은행 수익 부분 세계 2위를 달성한 골드만삭스이다. 마차를 돌아디니며 물건을 팔던 마커스 골드만은 맨해튼으로 이동해 어음과 차용증 거래 가게를 차렸던 게 금융 사업의 첫 시작이었다.
이후 사위 사무엘 삭스와 함께하며 금융 기업 골드만삭스가 탄생한다. 당시 기업이나 상인들은 거래 대금을 현금으로 바로 지불하지 않고 약속어음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속어음
발행인이 일정 금액을 일정 시기·거래처에서 지불할 것을 약속한 어음
골드만삭스는 약속어음을 거래하며 연간 3천만 달러(약 1조 3,000억 원)의 수익을 챙겼다. 골드만삭스는 의류업 종사자들에게 무담보 어음을 발행하고 단기 자금을 빌려주었다. 유대인 의류업 종사자들은 어음을 바탕으로 의류업을 운영했다.
J.P. 모건은 미국을 대표하는 금융 기업으로 금융업계의 글로벌 리더이다. 글로벌 금융 그룹을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J.P.모건이다. J.P.모건은 기업 이름이기도 하지만 창립자 존 피어폰트 모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J.P.모건은 저명한 금융가 집안의 아들로 유럽의 증권을 맨해튼에서 판매하고 배급하며 맨해튼에 입성한 인물이다. J.P.모건은 동업자 드렉셀과 투자은행 드렉셀 모건 앤 컴퍼니를 설립한다.
J.P.모건은 기업들을 집어삼키는 방법으로 거대 금융 회사가 되었다. J.P.모건은 철도업을 넘어 금융 정보 확보에 주력하는데 전기 회사 웨스턴 유니온을 장악해서 회사들의 통신 내용을 도청해 금융 정보를 확보했다.
동업자 드렉셀이 사망하자 회사이름을 바꾸고 에디슨이 세운 회사 제너럴 일렉트릭을 인수하며 통신업을 장악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카네기 철강을 약 4억 8천만 달러에 사들여 자신이 소유한 철강 회사와 합병시킨다. 설립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 기업 US 스틸을 창건한다.
이렇게 J.P.모건은 산업 위에 금융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Q. 브루클린 다리 건설 공사 당시 최소 20여 명이 한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었는데요. 어떤 병일까요?
잠수병
급격한 기압 감소로 일어나는 케이슨병으로 노동자 20명이 사망한다. 브루클린 다리는 착공 후 14년 만인 1883년에 완공된다. 이 다리로 맨해튼은 많은 인구와 물자를 이송하며 현대 도시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에디슨의 전기는 맨해튼의 금융지구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 뉴욕증권거래소의 조명, 전기 타자기 등 첨단 기술을 도입한다. 에디슨은 긴 띠로 된 종이 위에 주식 정보를 표시하는 주식 시세 표시기까지 보급했다.
맨해튼이 전 세계 최고 경제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④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철강과 화약 등 유럽에 전쟁 물자를 납품해 돈을 쓸어 담았다. 철강 기업인 US스틸과 베들레헴 철강은 영국에 1억 3,500만 달러(약 5조 7,140억 원) 어치의 함포와 잠수함을 주문받았고 듀폰 역시 연합국 군수 물자의 40%를 제조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미국 기업이 전쟁으로 특수를 누리자 월스트리트도 호황을 맞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 종목 주가》
1914년 | 1915년 | |
아메리칸 스멜팅 앤리파이닝 컴퍼니 | $56 | $108 |
제너럴 모터스 | $81 | $500 |
베들레헴 철강 | $46 | $459 |
영국은 1년 동안 18억 달러가 넘는 전비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미국 회사인 J.P. 모건에서 약 5억 달러(약 21조 1,631억 원)를 대출한다. 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특수를 누리며 유럽을 호령하는 최대 채권국이 된다.
맨해튼은 막대한 자본력과 권력을 갖춘 금융 기업들에 힘입어 런던을 제치고 세계 제1 경제도시로 등극한다.
Q.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월스트리트에는 이것이 물려 들면서 세계 경제 도시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태평양과 유럽 두 전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때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평가되었다. 미국 은행이 보관 중인 금만 약 6,200톤으로 현재가치로 약 300조에 달했다.
이 금의 주인 대부분은 외국 은행이나 국제 금융기관들로 총 36개국에서 금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브레턴우즈 협정
1944년 미국 브레턴우즈에서 연합국 44개국이 모여 국제 통화 금융 회의를 열고 체결한 협정
유럽과 미국은 전 세계 통화의 기준 기축 통화를 달러로 결정한다. 달러의 안정성 확보는 월스트리트를 향한 투자로 이어지고 맨해튼으로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
1971년 온라인 증권거래소 나스닥이 탄생한다.
나스닥
1971년 창립된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 거래 시스템을 구축한 증권거래소
뉴욕거래소는 주식 중개인 브로커가 거래소에서 경매 방식으로 주식을 직접 거래하는 방식으로 하루 두 번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벨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탄식으로 늘 시끌벅적했다. 나스닥은 투자자가 브로커에게 전화로 원하는 주식의 매수·매도 수량을 전달하면 브로커는 나스닥을 통해서 매수량을 입력만 하면 되었다.
월스트리트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던 벨포트 사건이다. 조던 벨포트는 고객의 돈으로 수익을 올려주는 주식 트레이더로 공격적인 영업 방식으로 월스트리트의 늑대로 불린 인물이다.
그가 돈을 버는 수법은 펌프 앤 덤프*였다.
펌프 앤 덤프
주가가 낮은 기업의 주식을 인위적으로 상승시켜 판매하는 주가 조작 방식
조던 벨포트는 페니 스톡*이라는 주식을 팔았는데 쉽게 말해 쓰레기 주식을 판 것이다.
페니 스톡
주당 가격이 1달러 미만인 소규모 주식
당시 벨포트는 15억 달러(현재가치로 약 4조 7천70억 원)가 넘는 실적으로 올리며 유명 매체들에 기고하는 저명한 금융 인사가 된다.
그러다 벨포트의 사기 행각이 덜미를 잡히게 되는데 회사를 사들이고 싶었던 벨포트는 차명계좌로 한 주식을 약 85%나 사들이던 중 FBI가 체포한다. 1999년 그의 사기 행각이 모두 들통나면서 조던 벨포트는 증권 사기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된다. 당시 피해액은 약 2억 달러(현재가치로 약 4천9백억 원)에 달했다.
| 탐욕에 빠진 월스트리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미국에는 세 단계의 신용등급이 있었다.
- 프라임 (높은 신용 등급)
- Alt-A (중간 신용 등급)
- 서브프라임 (낮은 신용 등급)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채가 많거나 소득이 적어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주택담보대출
당시 미국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집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 주택 가격이 상승했다. 은행을 대출 이자로 돈을 벌 욕심으로 서브프라임 등급까지 대출을 해주었다. 당시에는 죽은 사람 이름으로도 대출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거품이 꺼지고 주택담보대출 이자가 상승하자 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이 집을 포기하고 파산했다. 파산자의 집은 당연히 은행 소유가 되었다. 문제는 주택 수요가 줄며 은행이 압류한 집 가치도 하락한 것이다. 집값이 떨어지며 은행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파산했다. 거기에 은행에 투자했던 금융 기업도 같이 파산했다.
이 일로 세계 4위 은행인 리먼브라더스도 파산하고 강제로 집을 비우게 된 경우가 400만 건 이상이었다.
| 전 나스닥 위원장이 저지른 72조 사기 방법의 실체
버나드 메이도프는 1970년대 초부터 2008년까지 그에게 투자를 맡긴 고객만 해도 136개국에서 3만 7천여 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8년 12월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폰지 사기
새로운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 배당을 지급하는 투자 사기 수법
그가 투자받은 금액은 약 650억 달러로 약 72조 원 규모였다. 심지어 그의 고객에는 유럽 최대 은행 HSBC를 포함한 세계 여러 은행은 물론 보험사와 증권회사까지 그의 고객이었다.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고객들의 투자금 반환 요구가 빗발치자 궁지에 몰린 버나드 메이도프가 가족에게 진실을 밝히는데 이를 들은 두 아들이 아버지를 사기 혐의로 신고한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150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버나드 메이도프의 재산 약 1,710억 달러는 전부 몰수되었고 가족들에게 배상 요구가 이어지자 큰아들은 자살했고 둘째 아들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월스트리트에 나타난 시위자들은 미국 최상위 1% 엘리트의 탐욕이 가져온 금융 피해가 99%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고 외쳤다.
이 시위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면서 미국 대선 때마다 월스트리트와 금융 기업에 대한 비판이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대선에서 이기고 나면 언제 비판했냐는 듯 월스트리트 출신들이 정부 주요 인사가 되면서 월스트리트의 영향력을 반증하고 있다.
재미있게 보셨다면
구독 부탁드려요
* 인용된 사진과 문구는 해당 방송국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