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50회
'죽음의 골짜기'
| 뼈 골짜기의 비밀
1993년 대전 한 골짜기 곤룡재에서 심규상 기자가 땅을 살피며 서성이고 있다. 주변을 살펴보니 뼈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왜 사람뼈들이 있는지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으니 누군가 와서 사건에 대해 물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며 기자에게 경계심을 드러냈다.
심기자는 마을 어른신들에게 막걸리와 담배를 사드리며 경계심을 풀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골짜기에서는 오래전부터 사람 뼈가 많이 나와서 짐승들이 사람 뼈를 물고 다녔다고 한다.
골령골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뼈가 산처럼 쌓여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 골령골에서 생긴 일
1949년 4월 충남 서천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름이 남식이다. 남식이네는 친인척을 합하면 2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남식이가 첫돌이 지나고 두 달 후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한다.
누군가 남식이네 집에 찾아온다. 아버지는 경찰관 2명에게 연행되었다. 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작은 아버지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경찰국으로 무선전문이 하달된다. 전문에는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요시찰인
사상이나 보안 문제로 감시대상이 된 사람
요시찰인은 주로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요시찰인은 독립운동가를 뜻했지만 광복 이후 요시찰인의 의미는 달라진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반발하는 좌익을 의미했다.
남식씨의 아버지는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서천에 내려와서는 동아일보 서천지국장을 맡았었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좌익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정
광복 이후 남한단독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 미군이 남한지역에 실시한 군사통치
남식씨 아버지는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했었다. 그 취재 때문에 남식 씨 아버지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국민보도연맹 서천지국장을 맡아주면 전과를 사면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미군정은 인원수를 할당해서 경쟁적으로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하고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보리쌀, 비료, 고무신을 배급했다. 좌익을 모르는 사람까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렇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약 30만 명이었다. 그 선택은 운명을 갈랐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보도연맹 서천지부장이었던 남식 씨 아버지도 이때 끌려갔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호해 준다고 했지만 인민군이 내려오면 인민군 편에 설지도 모른다며 보도연맹원들을 싹 다 잡아들였다.
남식 씨 아버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갔다.
당시 제주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절 집회가 열렸다. 그때 기마 경찰이 어린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아이가 다쳤지만 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렸다.
화가 난 도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항의를 했다. 이를 폭동으로 오인한 경찰들이 도민들을 향해 발포를 한다. 그 결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 일로 도민들이 크게 반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좌익극렬분자로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참다못한 제주 도민들은 이듬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주 4.3 사건
한편 여수와 순천 지역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조두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한다. 그렇게 일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 바로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미국 제25사단 CIC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되었다.
이 기록은 6월 28일경부터 6월 30일경까지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들이 골령골에서 살해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1,400명이 죽음을 당했다.
남한 정부에 의한 1차 학살(6.28~6.30)
약 1,400명
이들은 나무 기둥에 묶인채 총살당했다. 그리고 시신이 50~60구가 모이면 장작더미에 던져 화장했다.
7월 1일 새벽 기울어진 전세에 대전에서 피신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은 비밀리에 남쪽으로 떠났다. 대전형무소에는 한 통의 전문이 도착한다.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 적의 대규모 공습이 예상된다.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전에 남은 재소자들의 처형을 지시한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재소자를 인도받은 헌병대가 골령골로 향했다. 인근 주민들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서 구덩이를 미리 파놓았다. 재소자를 엎드리게 해서 사살한 후 구덩이에 시신을 밀어 넣었다.
골령골의 비극은 3일간 반복되었다.
1999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
북한의 라디오에서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혹성과 집단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가 있었다.
비록 라디오에서 상당 부분 과장됐다 하더라도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은 집단적인 학살을 자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의 1,800명의 정치범 집단 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남한 정부에 의한 2차 학살(7.3 ~ 7.5)
약 1,800명
남한 정부에 의한 3차 학살(7.6 ~ 7.14)
약 1,700명
골령골에 묻힌 수많은 유해의 정체는 그해 여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학살의 피해자들이었다. 세 차례의 학살이 끝난 직후 인민군은 대전을 점령했다. 그리고 인민군에게 골령골 학살 현장이 발견되었다.
유엔군의 극비작전으로 전세는 뒤집힌다.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이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6.25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 작전
인민군은 다시 북으로 후퇴하고 국군은 빼앗겼던 도시를 되찾았다. 하지만 폐허가 된 대전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다. 대전형무소 근처에는 처참한 시신들로 가득했다. 시신 더미에서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1950년 7월 21일 골령골에서 학살의 흔적을 목격한 인민군들은 경찰, 공무원, 청년방위대 등 우익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이들을 대전 형무소에 잡아들이고 인민형무소라고 불렀다. 잡아들인 이들의 죄목은 양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죄였다.
전세가 역전되자 인민군은 후퇴하기 전 각 지방 당에 명령을 내린다.
유엔군 상륙 시 버팀목이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인민군은 대전형무소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렇게 무려 1,557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북한 정부에 의한 학살 (9.25 ~ 9.27)
1,557 명
국군과 경찰이 좌익을 인민군이 우익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음까지 이르게 한 비극이 반복되었다. 이승만과 독재정부는 인민군의 학살만 국민들에게 알려왔다.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해 조사 위원회가 꾸려지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우리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들은 숨 죽인 채 살아왔다.
골령골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92년이다. 잡지에서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을 접한 심기자는 진상조사반을 꾸려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2007년 대전 골령골이 첫 유해발굴지로 선정되었다. 유해발굴 전 반드시 땅 주인의 동의가 필요한데 땅 주인은 땅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유해발굴을 반대했다.
심기자는 골령골의 다른 매장지를 찾아내겠다며 진실화해위원회에 한 달의 기간을 달라고 한다. 그렇게 매장지를 찾아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57년 만에 34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연좌제
범죄자와 친족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
아버지를 잃은 유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자식들은 빨갱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조사 보고서 발표
본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한 것으로서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골령골 사건의 최종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하고 그들을 위로해 줄 것을 권고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기한이 정해진 한시적 조직이라 이내 해산된다. 위원회가 해산되면서 모든 일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많은 유해들이 있는데 정부의 유해발굴 작업은 중단되었다.
유족들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민간차원의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2015년 골령골 민간 유해발굴단이 작업을 개시했다. 민간 유해발굴단은 2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2016년 정부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설립하기로 한다. 평화공원을 세울 후보지를 공모한다는 얘기에 심기자는 평화공원을 지으려면 땅을 재정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 유해 발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대전 골령골에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정부 차원의 유해발굴이 시작되었다.
2020년부터 3년 동안 발굴한 유해가 1,387 구였다.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는 총 1,441구이다.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린다.
유해는 발굴만 되었을 뿐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 평화공원에 세워지면 그것에 안장할 계획이었는데 2020년 완공 계획이었던 평화공원은 아직까지 세워지지 않았다.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분류 작업을 거쳐 대전 골령골을 떠났다. 유해들은 세종시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
유족들의 슬픔과 원한이 골을 이룬 그곳에 평화공원이 세워지는 날 죽음의 골짜기가 아닌 평화와 화해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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