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51회
'610년 만의 붕괴, 숭례문 방화 사건'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 국보 숭례문에 불이 난다. 설 연휴 마지막 날 대한민국을 뒤흔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숭례문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네 개의 문 중에 정문이자 1398년에 완공된(무려 610년 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흥인지문이 소실됐을 때도 6.25 전쟁 때도 숭례문은 무너지지 않았다.
출동한 소방관은 많은 물을 부었는데도 연기가 계속 나는 것을 이상하게 느낀다. 연달아 소방차가 도착하는데 그때 수압이 강한 방수포가 아닌 상대적으로 약한 소방 호스를 사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진화작업 30분 후 천장에서는 연기가 계속 나고 있었다. 천장 서까래 사이에서 계속 연기가 나고 있었다.
훈소 화재
온도가 낮거나 산소가 부족한 상황 때문에
화염 없이 연기만 내뿜으며 연소되는 현상
평소라면 지붕을 부수고 물을 뿌리면 되는데 숭례문은 문화재라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 소방관은 해당 기관에 연락해 지붕을 부숴도 되는지 알려들라고 한다. 당시 문화재청 지금은 국가유산청으로 연락을 했고 관계자들이 오고 있었다.
국가유산청은 대전에 위치해 있어 관계자가 도착하는데만 적어도 두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연휴 기간으로 몇 명 직원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에 근무하던 김성도 사무관은 바로 상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오후 9시 33분 화재 비상 1호*가 발령된다.
화재 비상 1호
일반적으로 10명 미만의 인명피해
상황 해결에 3~8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현장 지휘 대장의 권한으로 발령
문화재청은 문화재가 훼손되어도 적극적으로 진화를 해달라고 한다. 소방대원은 천장의 일부를 잘라내기로 한다. 바닥은 물로 가득했고 위쪽은 뿌연 연기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끼로도 체인톱으로 천장은 부술 수 없었다. 대원들이 천장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오후 9시 55분 화재 비상 2호가 발령된다. 순식간에 100여 명의 소방관과 40여 대의 소방차가 투입되었다.
결국 기와를 부순 뒤 그 안에 소방수를 뿌리기로 결정한다. 이건 내부 작업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기와의 경사가 60도가 넘는데 당시 2월로 날씨가 추워 뿌린 물이 전부 얼어있었다.
그때 갑자기 현판부근에서 연기가 막 나더니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문화재청 관계자는 적심에 불이 붙은 거라고 한다. 적심 위에는 강회라는 게 있는데 강회는 석회성분이라 작은 틈도 없다. 그래서 아무리 방수를 해도 물이 적심까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 10시 32분 화재 비상 3호가 발령된다.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간 소방대원은 팀장에게 현판을 먼저 철거해보겠다고 한다. 양녕대군의 글씨로 현판 문화재라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당시 현판의 무게는 600kg으로 두 대원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고리를 뺀 순간 현판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다행히 현판 테두리 일부만 파손되고 보호할 수 있었다.
소방대원은 기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기와를 깨도 안에 강회가 있어 지붕도 사람의 힘으로는 깰 수 없었다. 그 사이 불은 점점 번져갔다. 2층 누각은 붕괴 위험이 있어 소방대원은 철수했다.
대전에서 택시를 타고 문화재청 건축과장은 소방본부와 협의를 해서 중장비를 동원해 2층 누각을 파괴하기로 한 것이다.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화재발생 5시간 뒤인 새벽 1시 56분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붕괴되었다. 새벽 2시 5분 불길은 완전히 진화되었다. 다행히 1층 누각은 90% 이상 살릴 수 있었다.
담벼락 근처에서 철재 사다리가 발견되었다. 화재 현장에서는 일회용 라이터와 시너성분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숭례문 화재는 방화사건인 것이다.
감식 결과 최초 발화 지는 2층 누각 세 번째 기둥 바닥이었다. 기둥을 타고 올라간 불씨가 적심에 붙은 것이다. 1961년 숭례문 보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적이 있는데 나무를 깎고 남은 조각들을 지붕 안에 넣었다. 그게 숯 역할을 하면서 공기와 만나 불이 붙은 거였다.
범인은 23시간 만에 검거된다. 뉴스에서 숭례문 방화를 본 목격자는 범인을 본 것 같다고 신고했다. 이 얘기를 들은 경찰은 CCTV를 확인하는데 화질이 좋지 않아 범인은 확인하지 못하고 방화 추정 시간만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미리 조사했던 방화 사건 용의자를 추려 보냈고 담당자는 용의자를 3명을 추렸다.
- 용의자 A : 60대 2006년 4월 창경궁 방화 / 토지 보상 불만에 의한 계획적 범행
- 용의자 B : 20대 2006년 5월 수원 화성 서장대 방화 / 신변비관에 따른 우발적 범행
- 용의자 C : 30대 2007년 3월 서울 강북구 도선사 방화 / 정신 이상에 따른 범행
유력 용의자 A 씨는 강화도에 살고 있었는데 휴대전화가 꺼져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찾아가니 그는 집에 없었다. 마을 주민이 마을회관에서 봤다는 말에 찾아가니 용의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경찰은 그를 차에 태웠는데 용의자는 집에 가자고 했다.
방으로 들어간 용의자 A 씨는 가방을 들고 오더니 다시 차에 탔다.
내 잡으로 올 줄 알았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그는 경찰서에서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 사건 당일 A 씨는 숭례문 서쪽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2m 높이의 성벽을 넘어서 누각 내부의 계단을 타고 2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너 세 통과 라이터를 꺼냈다. 시너 한 병은 바닥에 뿌리고 두 병은 옆에 세워두었다. 뿌린 시너에 불을 지른 뒤 바로 도주한다.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토지 보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2006년 A 씨의 집터가 재개발되면서 집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A 씨는 철거보상비로 책정된 금액의 약 5배를 요구했다. 결국 A 씨는 법적 절차에 따라 책정된 금액을 보상받았다.
불만을 품은 A씨는 건설사를 상대로 소송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창경궁 방화로 벌금 1,300만 원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집행유예 기간에 숭례문에 또 방화를 저지른 것이다.
범인은 열차를 탈선시킬까도 했지만 인명피해가 날 것 같아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국보 1호인 숭례문을 태우기로 한다.
결국 범인 A 씨는 문화재 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5년 3개월 뒤 2013년 5월 숭례문은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이 시간 동안 투입된 인원만 35,000여 명과 약 27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화재 이후 바뀐 게 있는데 문화재 방제 시스템이다. 소화기 32대와 스프링클러 그리고 화재감지기도 설치되었다. 이 사건 이후 소방대는 문화재 구조 파악을 위해 도면을 확보하고 문화재 화재 대응 합동 훈련도 진행했다.
한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대한민국 국보가 무너져버렸고 온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사건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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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문화재 훼손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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