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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부산에 살던 전병관 씨는 신문을 보다 기사 하나에 시선이 고정됐다. 오래전 어느 사고의 생존자를 찾는다는 자그마한 기사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수천 톤의 여객선이 바닷속으로 침몰했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과 비슷하다. 한국인 수천 명이 탑승한 여객선이 바다 한가운데 침몰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다. 배의 이름은 떠 나니는 섬이란 뜻의 '우카시마호'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한 꼬꼬무 112회 줄거리 시작합니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이야기 112회
| 의문의 부탁
2012년 잠수사 이응구씨는 의뢰인의 부탁으로 해외에 가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이 바다에 뛰어든 한국인은 67년 만에 처음이었다. 의뢰인 할아버지가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우키시마호 침몰 지점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 우키시마호의 비밀
2023년 9월 부산에 사는 전병관 씨는 신문을 보다가 우키시마호 생존자를 찾는 기사를 보게된다. 전병관 씨의 아버지 전영택 씨는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었다.
전영택 씨는 부산으로 가는 막차 우키시마호를 탔던것이다. 당시 18살이었던 전영택 씨는 1년 전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강제동원
일본 제국주의가 노동력 보충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한 일
전영택씨가 강제동원되어 간 곳은 아오모리현으로 눈으로 유명한 홋카이도 바로 아래로 5월에도 눈이 오는 아주 추운 곳이다. 전영택 씨는 활주로를 만드는 노동에 동원되었다. 아오모리현에만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수천 명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사람들이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가 공짜라며 타라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하다.
| 귀국선의 사람들
부산행 배의 출발지는 오미나토 항이었다. 훗카이도와 아오모리현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때 동원된 배가 우키시마호이다. 배가 엄청 커서 작은 배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작업반장은 전영택씨에게 저배가 위험한데 꼭 타야겠냐고 해서 찜찜했지만 배를 탔다.
배는 갑판아래 4층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천 명은 넘는 거 같았다. 일본해군이 밝힌 그날 승선인원은 약 4천 명(일본인 승조원 255명 + 한국인 약 3,700명)이었다.
1945년 8월 22일 22:00 우키시마호 출항
별일이 없다면 8월 25일이면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8월 24일에 육지가 보이는데 일본가옥이 보였다. 배가 멈춰서는데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배가 두 조각나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위로 올라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배가 침몰한 곳은 마이즈루만으로 육지와의 거리는 500m였다. 일본 해군 한명이 나팔을 불더니 작은 배 서너 척이 나타났다. 나타난 배는 구조배가 아니라 인근 고깃배가 구조작업을 했다. 그날 스스로 탈출하거나 구조된 사람은 단 몇백 명이 전부였다. 사고 며칠 후 해안가에는 시신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신원확인도 장례절차도 없었다.
| 생존의 기록
1990년 일본 아오모리현에 들린 전재진씨는 거기서 우연히 우키시마현 사건을 듣게 된다.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전재진 씨는 대전역 광장에 나가 무작정 유인물을 돌렸다. 그랬더니 생존자들에게 연락이 온다.
전재진 씨는 생존자들을 만나 영상을 남기기로 한다. 그렇게 83명의 생존자를 만나 기록을 남겼다.
미스터리 ① 첫 귀국선
우키시마호는 한국가는 마지막 배가 아니라 첫 번째 배였다. 우키시마호는 해방 일주일 만에 급조된 제1호 귀국선이었다.
우키시마호는 원래 민간회사 배였는데 1941년부터 해군 소속이 되면서 무기를 싣는 배로 용도가 변경된다. 함장 포함 대부분 승조원은 해군 소속이었다.
함장도 어민들에게 구조가 되었고 사고원인은 촉뢰라고 보고했다. 촉뢰는 기뢰와 접촉해서 폭발했다는 뜻이다.
기뢰
적의 함선을 파괴하기 위하여 물속이나 물 위에 설치한 폭탄
실제로 마이즈루만에서 미군이 투하한 기뢰때문에 폭발, 침몰한 사고가 있었다.
미스터리 ② 사고가 난 장소
승조원이 이상했던 점은 항해하는 3일 내내 일본의 해안선이 보였다는 것이다. 도미우리 함장은 항해를 하기 전에 명령이 있었는데 그 명령을 따른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8월 24일 이후에는 항해하지말고 가까운 항구로 들어가라
미스터리 ③ 인양 그 이후
1954년 사고 9년 뒤에야 우키시마호가 인양이 되는데 배에는 유골 수백구가 있었고 배 선체 바닥이 폭발해 찢어져있었다. 선채를 찍은 인양작업자는 찢어진 부분을 보고 의문을 가지게 된다. 기뢰를 맞았다면 찢어진 부분이 안쪽으로 휘어야 하는데 우키시마호는 바깥쪽으로 휘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키시마호는 기관총, 대포 등 무기도 화약고와 탄약고에 실려있었다.
미스터리 ④ 사상자 수
일본 정부는 사고 일주일 만에 사상자 수를 발표하는데 일본인 승조원 255명 중 25명 사망, 한국인 3,735명 중 524명 사망이라고 한다.
승선할 때 아무도 명단을 적지 않았는데 사망자 명단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사망자 명단에 생존자의 이름이 있었다. 생존자들이 그날 탑승객으로 추정하는 인원은 최소 5천 명에서 8천 명 사이이다.
| 수상한 움직임
3일째 되던 날 승조원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고 밥도 많이 주어서 한국인들은 이를 이상하게 느꼈다. 그리고 일부 승조원들이 구명정을 내린 후 짐가방을 챙겨 타는 것을 갑파에 있던 사람들이 보았다.
물을 뜨러 간다고 한 일본 승조원들은 구명정을 타고 우키시마호를 떠났다.
- 승조원들의 고백
승조원들은 그날 부산으로 가지않고 마이즈루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 해군이 밝힌 우키시마호 출항 이유는?
종전 직후 조선인 공원 다수는 귀국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며 불온한 조짐을 보였다.
일본 해군으로서는 이미 해고 완료한 전 공원을 귀선 시킬 의무가 없었으나
사태의 평온한 해결을 위해 우키시마호에 그들을 태웠다.
-1950.3.2 일본 인양원호청 제2복원국 -
사실 일본이 두려워했던 것은 마지막 결전지 아오모리 지역에 전투기지를 건설했는데 갑자기 패망하자 소련이 일본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약에 소련군이 아오모리 지역에 온다면 조선인들이 소련군과 합세하는 시나리오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동안 부려먹었던 조선인들이 이젠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들을 내보내려 서두른 것은 아닐까?
우키시마호 승선원들은 출항 명령에 거부감이 심했다. 부산에 가면 자신들이 포로가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황당한 점은 함장부터 승조원 중 단 한 명도 부산까지 항해한 경험이 없었다.
이 많은 의문점에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기뢰 접촉에 의한 불의의 사고라 주장한다.
| 가라앉은 진실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50년만에 소송을 건다. 승객을 안전히 수송하지 못한데 대한 손해배상, 일본에 있는 사망자들의 유골 반환,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소를 제기하고 일본 대법원 판결까지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나도 인정받지 못하고 전부 패소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잠수부에게 한영용씨가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유해였다. 2024년 현재 살아계신 생존자는 단 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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