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양프로까지 보는 망고예요 오늘은 꼬꼬무를 리뷰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물음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날, 그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날, 그 사건으로 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해준다고 하네요 그럼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43회 리뷰 시작합니다.
오늘의 주제 - 물음표에 관한 이야기
해외출장에서 막 돌아온 박영순씨! 에게 아내는 "도련님이 사라졌어" 리고 한다. 며칠째 회사도 집에도 안들어 오는 동생 박태순 (27세)씨는 선반공(금속재료를 다듬는 일을 하는 사람) 일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전단지를 돌리며 박태순씨를 찾아 나섰다.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목격한 회사 동료를 찾게된다.
때는, 8월 9일 토요일 태순씨 환영식이 있던 날, 8시에 회식이 끝나고 역곡역으로 동료와 태순씨가 함께 갔다. 태순씨는 집이 석수역으로 구로역에서 갈아타야해서 동료와 구로역에서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당시 지하철에는 CCTV가 없던 시절이였다.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형의 신분증을 가지고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왜?
심지어 사용했던 이름은 박영순 / 조인수 / 박상원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2001년 어느날 "박태순씨를 찾았어요"라는 전화한통. 9년만에 태순씨는 납골함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전해준건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였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과거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공권력에 희생된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사망원인은 달리는 기차에 치어서 즉사했다?!?
사인은 두뇌파열
"진짜 우리 태순이가 맞나요?"
"맞습니다"
확인절차는 주민등록상 등록한 지문과 조사 당시 채취한 지문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첫번째 물음표 - 태순은 왜 사고 직후 발견되지 않았나?
실종되었던 바로 그날 밤 9시 55분. 회식을 마치고 전철을 탄 그 이후에 발생했다.
두번째 물음표 - 태순은 왜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나?
태순씨의 집은 석수역인데 사고장소는 시흥역이였다. 석수역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린것이다.
세번째 물음표 - 전철을 탔는데 사고는 왜 기차 승장에서 ?
태순씨의 사고지점은 기차 승강장이다. 당시 시흥역은 전철과 기차가 모두 정차했다. 전철을 타고 가던 태순씨가 왜 기차 승강장에서 사고가 났을까? 시흥역의 기차는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구간이였다.
유일한 목격자가 있다. 사고가 난 기차의 "기관사"다. 사고열차는 무궁화호로 속도는 시속을 100km 순간 정면에 사람이 보여서 급제동도하고 기적도 울렸는데 사람이 순식간에 선로에 들어왔다는 증언.
사건 처리
주 거 : 일체불상
주민등록번호 : 불상
성 명 : 불상
무단횡단하다 운행중인 열차에 머리를 충돌 현장에서 사망
네번째 물음표 - 사라진 부기관사
열차 기관실 왼쪽은 부기관사 자리로 목격자는 한명 더있다. 충돌위치는 왼쪽으로 부기관사가 더 정확히 볼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관사는 임시조로 부기관사가 기억안난다고 한다.
위원회에서 운행일지를 요구하자 폐기했다고 한다.
사고현장에는 태순씨가 평소에 메고 다니던 크로스 손가방이 없었다. 유실물센터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섯번째 물음표 - 9년전에는 확인되지 않은 태순의 신원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한 태순씨는 9년전에도 신원조회를 했는데 그때는 찾을수 없었던 것일까?
태순씨는 사실 원래 공장 노동자가 아니였다. 한신대학교 철학과 85학번 학생으로
태순씨는 학생때 서클에 가입하는데 F(Family)1는 언더서클로 학교내에서 비밀로 조직된 시위에 참가하는것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서클은 사문서위조를 잘했다고 한다. 운동권 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살아야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영향때문이였다.
1970년 열악한 노동 환경의 개선을 위해 분신 항거한 전태일 열사.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전태일은 한자로된 근로기준법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대학생들은 전태일의 친구가 되어주고자 학생출신 노동자가 되었다.
1985년~ 1987년 위장취업으로 해고된 학출(학생출신노동자)이 624명이였다. 위장취업을 했던 태순씨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등으로 1년 6개월형을 받는다. 출소 후 다시 공장에 들어간 태순씨.
그러던 어느 날,
태순씨 친구 철우가 길을 걷는데 싸~한걸 느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따라오는걸 느낀다. 미행이 붙은 걸 느낀 철우씨는 달리기 시작한다. 택시를 잡아 탄 철우씨는 가로막는 승용차에서 내린 검은 양복 남자들은 박태순 어딨냐고 물어본다. 그렇게 철우씨를 경찰에 인계한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떠났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왜 박태순씨를 찾는걸까?
위원회에서는 그때 경찰을 만나면 검은 양복의 남자 정체를 알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간다.
국군기무사령부 - 군대내의 정보기관
마파람(남풍) 계획
군 복무 중인 인원을 대상으로 추진된
군대 내 대 좌익 업무 계획
문제사병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태순씨는 민간인인데 왜 관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먼저 군대에 간 친구 창연씨(마파람A급) 때문이였다. 창연씨와의 관계도에 있는 인물을 전부 관리대상으로 삼은것이다.
당시 기무사로 민간인 감시했던 팀원들의 진술
제가 수원지역에서 10월 초부터 출장을 가서
사건 관련자들이 위장 취업한 공장을 방문
백철우 자취방 앞 잠복근무 등을 한 것 같습니다.
백철우 자취방은 제가 방문을 연 후
팀원과 들어가서 책, 노트, 이념 관련 문건 등
수사에 단서가 될 만한 물증 확보 차원에서 수색했는데
저희가 들어간 흔적을 치우느라
바닥을 청소하고 정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신대 경찰 초소에서 망원경으로 교대 관찰
그 외 수원지역 경찰서를 방문한 일 등이 있습니다.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모두 운동권 학생으로 기차에 치여 자살로 내사 종결되었다. 위원회는 박태순을 미행했던 기무사 장씨를 찾아 박태순 자살 사건을 물어본다. 기무사 장씨는 모든 개입을 부인했다.
그때, 등장한 제보자가 등장한다. 기무사 장씨와 팀원으로 일한 이씨였다.
세월이 지나 민간인 신분이였던 이씨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다.
장OO이 1992년 9월 경
좌경계 사무실을 방문해 저에게 인사말을 건네면서
"휴가 나와서 들렀다"라고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전에 우리가 동향 내사하였던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라고 하여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하였더니
"수원지역의 경찰들을 만나고 올라왔는데 경찰들 이야기가 박태순이 죽었다"라고 하더라며
작은 목소리로 웃음을 띠면서 이야기했다.
"1992년 당시 기무사 장씨는 태순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한 이씨와 달리 장씨는 전혀 그런말 한적이 없다고한다. 위원회는 두사람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제안하고 둘다 받아들인다. 두 사람다 조사 당일 이를 거부한다.
기무사, 경찰, 법무부에 기록 열람을 요청했다.
경찰은 기록이 없고, 법무부는 대외비라서 협조 불가능, 기무사는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답변을 받는다.
결국, 위원회는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3년 2기 의문사위 1년간의 두번째 조사도 불능으로 결론이 난다. 2005년 진화위 4년 7개월간의 세번째 조사마저도 불능으로 결론이 난다.
박태순님은 마석모란공원에 묻히게 된다. 모란마석공원은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조사중인 것만 무려 8,500여건. 꼭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길 바래봅니다.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꼬꼬무 44회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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