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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144회 '언론사를 빙자한 비밀 정보기관 그리고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특사의 이야기'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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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144회

언론사를 빙자한 비밀 정보기관

그리고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특사의 이야기

 

| 궁궐에서 생긴 의문의 사건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경운궁은 고종이 머물던 곳이었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에서 불이 났는데 시작 지점은 경운궁 한가운데 위치한 함녕전이었다. 함녕전은 당시 고종황제가 잠을 자던 침전이었다. 고종은 함녕전에 없었지만 거대 바람을 타고 경운궁 남쪽과 북쪽을 한꺼번에 태웠다.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 공사관이 많았는데 고종은 당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시기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세계열강들은 대한제국을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당시에는 궁궐 안에서 화재가 나면 궁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것이 규정이었다. 반란을 대비해서 문을 닫았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확인한 궁궐의 모습은 참담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궁궐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괴문서 때문이었다. 

 

 

 

송림유변 : 소나무 숲에 변고가 생긴다.
호미선장 : 호랑이 꼬리에 먼저 숨는다.
청룡지석 : 청룡의 옛날
기위양순 : 양순의 위치에 의탁한다.

 

위의 괴문서를 풀이하면 내용은 이랬다.

"경운궁에 변고가 일어나고 고종황제는 먼저 수옥헌에 숨게 된다. 1904년 4월 21일 고정황제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 글귀가 내걸린 시기는 1904년 초에 걸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고종을 창덕궁으로 보내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대한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일본과의 갈등 심화

 

고의로 방화가 났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종 실록 44권에는 함녕전의 구들을 고치고 불을 지피다가 이 화재가 났는데 게다가 바람이 사납게 부는 통에 불길이 번져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 치역적인 역사의 현장

고종은 황실 도서관인 소옥헌에 머물기로 한다. 1905년 11월 17일 수옥헌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첫째,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대리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없다는 얘기는 주권을 가진 국가로 인정 받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둘째, 통감부를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첫 단계에 돌입한 일본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그날 밤 무장한 일본군이 경운궁을 둘러쌌다. 일본이 파견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에게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황제는 끝까지 거절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 대신들을 위협한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을사오적
학부대신 군부대신 내부대신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 제국익문사 그리고 61명의 비밀요원

제국익문사는 매일 사보를 발간하는 신문사였는데 그건 겉모습이고 실제 하는 일은 달랐다. 제국익문사는 고종황제 직속 비밀 정보기관이었다. 주로 일제 동향이나 주요 인물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비밀 정보기관이었다. 

 

그들은 61명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제국익문사에서 일하던 비밀 요원 중 정체가 드러난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고정황제는 이들을 통해서 국내외 정보를 수집했다.

 

| 황제의 첫번째 특사 호법신 검사 이준

1907년 3월 24일 밤 고종황제는 비밀리에 한 남자는 중량전으로 불렀다. 그는 고종황제의 비밀 칙령을 수행하기 부산으로 떠났다.

 

1906년 고종황제는 황태자의 결혼으로 은사령을 내린다. 은사령은 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을 면죄해 주는 제도인데 이준이 그 명단을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적은 을사오적을 암살하려고 했던 나인영과 오기호를 은사령 명단에 올렸다.

 

하지만 이준의 상관인 형사부장이 마음대로 명단을 수정했다. 일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빼버린 것이다. 이적은 참지 않고 고소를 했는데 그 벌로 태형 70대를 맞아야 했다. 이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재판장, 법관들, 법부대신을 처벌해 달라고 청원서를 올렸다.

 

법부대신 이호영을 탄핵하고 호법신이라는 별칭을 얻게되었다. 이 일로 검사를 그만뒀지만 고종황제 눈에 들게 된다.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
그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라!

 

 

대한제국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을 받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없어져 고종황제는 일본 몰래 비밀 특사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게 바로 '헤이그 특사'이다.

 

| 목숨을 건 임무 헤이그 특사

부산에 도착한 이준은 러시아로 가는 배에 오른다. 1907년 5월 9일 이준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는데 그 역시 고종황제가 임명한 특사였다. 그는 이성설로 당시 나이 37세였다. 

 

이상설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었다. 그는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을 직접 목격한 후 비통한 심정으로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침묵했다. 이에 이상설은 관복을 벗고 을사늑약 파기 운동에 나섰다. 종로 거리로 뛰쳐나가 연설을 하던 그는 비통함에 자결을 시도했다. 

 

목숨을 건진 이상설은 이듬해 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서 서전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학비는 무료였고 수업은 반일 민족교육이 핵심이었다. 이상설은 교육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이준이 보낸 전보를 받은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톡으로 나온 것이다. 고종황제의 임무를 받은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향했다. 

 

헤이그로 가기전 이준과 이상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또 다른 특사를 만난다. 세 번째 특사는 이위종으로 당시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외국 생활을 많이 했고 7개 국어를 할 정도로 언어의 천재였다. 

 

3인의 특사는 헤이그로 떠나기 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나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도와달라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다. 하지만 러시아 황제는 헤이그 특사를 만나주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정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다.

 

포츠머스 조약 중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러시아는 패배한 후에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헤이그 특사는 15일을 더 머물렀지만 러시아 황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시작되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헤이그 특사들은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지 못하고 헤이그로 떠났다.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날은 1907년 6월 25일이었다. 이준이 안국 자택을 떠난지 64일 지난 때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호텔 밖에 태극기를 걸었다.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공식 특사임을 알린 것이다.

 

만국평화회의에는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200여 명이 넘는 대표들이 모여있었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불법 행위를 회의 안건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네덜란드의 초청국 명단에 없으니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한국 특사의 입장을 불허한 러시아 의장은 본국인 러시아에서 이미 전보를 받았는데 전보 내용은 대한제국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협조를 구할 경우 이를 거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특사들은 돌아가야만 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특사들은 미리 준비해 온 공고사를 각국의 대표들에게 전달했다. '왜 한국을 제외하는가?'라는 내용을 만국평화회의보라는 신문에도 게재했다. 그리고 일본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혔다.

첫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승낙 없이 행동을 취했다.

둘째,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셋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국가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

 

각국 대표들 그 누구도 특사들의 외침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사실 특사들의 이 임무는 성공하기 힘들었는데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영국과는 영일동맹으로,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과 지배권을 갖기로 약속을 맺었다.

 

| 헤이그 특사 처절한 외교 전

대한제국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각국의 대표들은 일본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 했다. 평화회의는 강대국들의 이익만 대변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특사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물밑 외교를 펼쳤다.

 

특사들의 평화회의 입장은 끝내 좌절되었다. 

 

그래서 특사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한다. 만국평화회의에는 시민운동가와 150여 명의 기자들이 있었다. 특사들은 그들을 만나기로 한다.

 

특사를 만난 기자는 대한제국의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거짓된 평화를 일깨워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이위종에게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해달라고 한다.

 

특사는 당연히 제안을 승낙했다. 이위종은 150명의 기자가 모인 강단에 올라서 연설을 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후 특사들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온다. 이위종이 아버지의 급한 연락을 받고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후 7월 14일 저녁 7시경 홀로 호텔방에 남아있던 이준이 사망한다.

 

사망 이틀 후에 이준의 유해는 인근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는데 그날 장례 행렬에 참석한 사람은 이상설과 호텔 주인이었다. 기록이 모두 달라서 아직도 사망원인은 알 수 없다. 당시 한국에는 이준이 자결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준 열사의 사망으로 헤이그 특사의 공식 활동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세명의 특사를 피고인으로 궐석재판을 열었다.

 

궐석재판
당사자 한쪽이 출석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하는 재판

 

피고인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일본은 특사들에게 모욕을 주려했던 것이다.

 

정미 7 조약
1907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요한 조약
정미년에 맺은 7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약

 

일본은 언론탄압을 위해 신문지법을 만들었고 보안법을 만들어서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7천 명 밖에 남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 모두가 고종황제가 물러난 후 10여 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헤이그에 남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세계열강들을 찾아가서 마치지 못한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고자 했다. 그중에 하나가 미국에 루주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일이다. 미국과 우리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82년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한 조약

 

두 특사는 루주벨트에 세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그 조약을 지킬 것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주벨트는 면담을 거절했다. 둘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의 유해를 대한제국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외교권을 일본이 가지고 있어 유해를 가져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공동묘지에서 이준의 장례식을 치른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 두 특사의 끝나지 않은 임무

이위종은 항일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의병대장 이범윤과 안중근 장군이 속했던 동의회의 회장이 이위종이었다. 이위종은 러시아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러시아군 장교가 된다. 1920년 이후 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어느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것이다. 안중근 장군은 이상설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기록이 있다.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구실 삼아 한일병합을 서둘렀다.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 했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상설은 국내외 모든 의병을 통합한 단일 이병 부대인 '13도 의군'을 만들었다. 최초의 해외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이상설은 정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병을 얻은 이상설은 1917년 라시아 우수리스크라는 도시에서 사망한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째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세 분의 특사모두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광복 후 헤이그에 묻힌 지 56년 만에 이준 열사의 유해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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