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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136회 이야기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 최초의 두 가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 등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세운 위대한 여성, 방사능의 어머니 기록을 세운 위대한 여성은 바로 방사능의 어머니 마리 퀴리이다. 본인뿐 아니라 남편, 딸, 사위까지 노벨상만 6개를 받은 퀴리 가문. 그런데 마리 퀴리의 화려한 영광 뒤에는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 시작합니다.
노벨상만 6개?! 퀴리 가문엔 특별한 것이 있다.
| 여성은 대학 입학 금지? 마리 퀴리의 선택은?
수학교사인 아버지를 둔 마리퀴리는 자연스럽게 과학을 접했고 신동으로 학교도 일찍 졸업했다. 그런데 첫째 언니와 어머니의 사망 그리고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그러다 16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리퀴리는 대학교를 꿈꾸게 된다.
마리 퀴리가 대학교에 가고자 했던 19세기말 유럽은 여성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남성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Q. 독일의 한 해부학 교수는 여성과 남성의 이것을 비교하며 여성이 대학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요. 어떤 주장이었을까요? 여성이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뇌가 가벼워서였다.
대학교에 가고 싶었던 마리퀴리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데 프랑스는 여성의 중등교육 보장 및 대학 입학도 허용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마리 퀴리는 폴란드는 떠나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다.
마리 퀴리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마리 퀴리가 찾은 방법은 입주 가정교사를 하기로 한다. 당시 입주 가정교사는 하녀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았다. 마리 퀴리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5년이나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Q. 마리 퀴리는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되지 않으면 이것을 했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수학문제를 풀었다.
| 마리 퀴리의 험난한 소르본 대학 생활기
마리 퀴리는 대학교에서 이방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소르본 대학 자연과학부에는 1,800여 명 중 여학생은 단 23명 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한 마리 퀴리는 물리학 학사 자격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다.
Q. 수학 학사 자격시험을 본 마리 퀴리는 결과에 크게 실망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등을 해서
- 마리 퀴리에게 다가온 핑크빛 사랑
연구실을 찾던 마리 퀴리는 지인의 소개로 35살 과학자 피에르 퀴리를 소개받는다. 처음 만난 둘은 바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은 생일 선물로 서로의 논문을 주기도 했다.
둘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고 집에는 연구실을 차리로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마리 퀴리는 편견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박사 논물을 쓰기로 한다.
- 인류가 몰랐던 미지의 광선 '엑스레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 광선이 왜 발생하는지 원인을 알 수 없어서 X선이라고 했다.
엑스레이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우연히 발견한 광선 인체를 일부를 투과해서 내부를 볼 수 있다.
엑스레이가 발견되지 과학계에서는 또 다른 광선을 찾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 세계 최초 방사선과 방사능의 개념을 만들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광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마리 퀴리는 '자발적으로 주변에 에너지를 방출하는 광선'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방사선이다.
방사선
방사성 원소가 붕괴할 때 주변으로 내뿜는 입자와 에너지
방사능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성질
마리 퀴리는 우라늄에 다량 포함되어 있는 피치블렌드를 조사하다가 강한 방사선을 뿜는 물질을 발견하는데 이 말은 새로운 방사성 물질이 있다는 의미였다. 연구가 힘을 받으면서 남편 피에르 퀴리도 연구에 참여한다. 마리 퀴리는 갖고의 노력 끝에 강한 방사능을 내뿜는 화합물을 정제하는 데 성공한다.
-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원소! 폴로늄을 발견
마리 퀴리는 새로운 원소에 폴라드에서 따온 폴로늄이라고 명명한다. 이 원소는 우라늄보다 무려 400배 높은 방사능 수치를 내뿜는 원소였다.
1898년 직전 원소는 단 77개뿐이었다. 그런데 마리 퀴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방사능의 발견은 태양 외에도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1903년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앞둔 유명 과학자로 등극한다.
Q.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 전까지 마리 퀴리는 엄청난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벨 위원회에서 남편에게만 상을 수여하려고 했음
당시 피에르 퀴리는 노벨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마리 퀴리가 반드시 수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마침내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음에도 여성을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마리 퀴리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피에르 퀴리는 소르본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마리 퀴리는 어디에서도 교수 제안을 받지 못했다.
둘째를 낳고 2년 뒤 남편 피에르 퀴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비가 내리던 4월 피에르 퀴리가 길을 건너던 중 마차를 그를 덮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때 마차의 뒷바퀴가 피에르 퀴리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고 두개골이 16조각으로 부서지며 사망하게 된다.
남편을 따라고 가고 싶었지만 마리 퀴리는 가장으로서 두 아이를 책임져야 했고 남편과 함께하던 연구도 이어 나가야 했다. 그리고 남편의 재직하던 소르본 대학교 물리학 교수 자리가 마리 퀴리에게 주어진다.
- 세상을 놀라게 할 마리 퀴리의 발견! 라듐
마리 퀴리는 라듐을 순수한 상태로 추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라듐
마리 퀴리가 발견한 방사성 원소로 매우 강력한 방사능을 내뿜는 금속 물질
마리 퀴리는 세상에 없었던 방사성 원소를 2개나 발견했던 것이다. 라듐의 특징은 어둠 속에서 형광빛을 띤다는 것이었다. 라듐이 강한 방사선을 내뿜기 때문에 형광빛을 내는 것이었다.
마리 퀴리는 발견 이후 약 10년 만에 0.1g의 순수한 라듐 추출에 성공한다. 이는 라듐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전 세계에 라듐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열풍으로 라듐이 들어간 화장품을 바르고 먹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강한 방사능을 가진 라듐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라듐의 위험성이 알려진 건 1920년대 미국의 시계 공장 소녀들 사건에 의해서이다. 당시 시계는 어두운 밤에도 잘 보이기 위해 라듐을 페인트칠해서 사용했다. 시계 공장에서는 임금이 낮은 어린 소녀들을 고용해서 작은 시계에 라듐을 칠하게 했다.
세밀한 시곗바늘에 라듐을 칠하기 위해 소녀들은 라듐 페인트를 작은 붓에 묻힌 후 입에 넣어 붓을 뾰족하게 다듬어서 사용했다. 시계 공장 소녀들은 방사능에 피폭되어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재판까지 이어졌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라듐의 위험성은 여전히 인지되지 못했다.
에덴 바이어스는 부상을 인해 라듐 생수를 처방받았고 그는 4년간 매일 복용했다. 라듐은 칼슘과 화학적으로 비슷해서 칼슘을 대신해 뼈에 축적되는데 뼈에 축적된 라듐은 골수 세포를 파괴하고 돌연변이를 유발한다.
라듐이 발견되고 약 40년이 지난 1938년 시계 공장 소녀들이 재판에서 승리하면서 라듐의 위험성이 밝혀지게 된다.
- 노벨 위원회가 마리 퀴리의 수상을 번복한 이유?
노벨 위원회는 마리 퀴리에게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주게 된다. 그런데 노벨 위원회는 마리 퀴리의 불륜설을 문제 삼으며 노벨상 시상식에 오지 말라고 통보한다.
마리 퀴리의 불륜은 사실이었고 상대는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었는데 그는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폴 랑주뱅
초음파로 잠수함을 탐지하는 기술을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제자로 남편을 잃은 마리 퀴리를 위로해 주었고 둘은 곧 연인이 되었다. 밀회를 즐기던 둘의 관계를 폴 랑주뱅의 아내가 알게 되면서 마리 퀴리를 찾아가 당장 프랑스를 떠나라고 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마리 퀴리는 결국 랑주뱅과 이별하고 피신을 떠나야 했다.
1911년 마리 퀴리는 피하지 않고 노벨 시상식에 나타나 수상을 한다. 이때 마리 퀴리의 나이가 44세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본 마리 퀴리는 부상병을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 엑스레이 장비를 갖춘 리틀 퀴리를 만들어 부상병을 치료했다.
오랜 기간 방사능을 연구하며 서서히 피폭되고 있던 50대의 마리 퀴리는 건강이 악화된다. 전신이 쇠약해진 마리 퀴리는 커다란 이명에 백내장까지 생기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갔다.
- 딸 이렌 퀴리! 방사능 연구의 혁신을 이끌다
큰 딸 이렌 퀴리는 소로본 대학에서 물리, 화학, 수학을 공부했고 엄마 연구소에서 폴로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과학 유망주였다.
마리 퀴리가 최초로 자연 방사성 물질을 찾아낸 것에 이어 이렌 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렌 퀴리 부부는 1935년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을 하게 된다.
마리 퀴리는 딸과 사위의 노벨상 수상을 보지 못하고 1년 전 1934년 6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 국립묘지 팡테옹에 묻히게 된다. 마리 퀴리의 유해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어 납을 두른 특수한 관에 시신을 보관하고 있다.
마리 퀴리의 연구 노트는 지금도 방사능을 내뿜고 있어서 열람을 하려면 방호 장비를 갖춰 입어야 한다.
방사능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이렌 퀴리는 59세의 나이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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