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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세계사 164회 '암살부터 대학살까지! 소련 비밀경찰의 역사'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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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164회

'암살부터 대학살까지! 소련 비밀경찰의 역사'

 

| 러이사 제국의 몰락이 만들어낸 '비밀경찰'

소련 비밀 경찰의 시작을 이끈 인물은 스탈린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레닌*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 사회주의 혁명가
- 소련 비밀경찰의 시작을 이끈 인물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는 혁명이 발발한다. 러시아 혁명은 정부의 무능함과 잇따른 전쟁의 패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민심이 폭발한 사건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자 임시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이때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뿌리내리려 한 인물이 바로 레닌이다.

 

 

러시아 내전(1917~1922)
러시아 제국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에서 벌어진 혁명파(붉은 군대)와 반혁명파(백군)의 내전

 

러시아 제국 안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고 주변 국가들까지 독립을 시도하며 혁명정부를 공격했다. 레닌은 나라 안정을 위해서 반혁명파를 강하게 탄압하기로 한다. 1917년 12월에 최초의 비밀경찰인 '체카'라는 조직을 창설한다.

 

체카의 주요임무는 반혁명 활동과 혁명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색출해서 무력화하는 것이다. 창설 당시 체카의 인원은 40명이었다. 하지만 체카 조직이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1918년 레닌의 암살 미수 사건이다. 

 

레닌은 괴한의 습격을 받아 총알 두 발이 어깨와 턱을 관통한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레닌은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레닌을 암살하려 한 인물은 현장에서 체포되는데 그 사람은 사회주의자혁명가당원으로 파니 카플란이라는 여성이다. 카플란은 레닌이 다른 정당의 활동을 금지한 것에 분노해 암살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암살 시도 사건에 벌어지자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그래서 체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심한다. 

 

Q. 레닌은 체카에세 반혁명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이 권한을 부여한 권한이 무엇일까요?
체카에게 반혁명 세력을 즉각 총살할 수 있는 권한 부여

 

체카 조직은 처음에 40명으로 시작했는데 창설 4년 만에 약 5천 배인 20만 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체카를 해체하려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체카를 창설했던 장본인인 레닌이었다. 

 

 

1922년 혁명 정부와 반혁명 세력 사이의 내전이 끝나자 레닌은 극단적인 탄압이나 사형을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레닌은 1922년 6월에 체카를 해체하고 12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을 건국한다. 

 

1924년에 뇌졸중으로 레닌이 사망하고 권력의 공백을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

 

레닌 다음으로 소련의 정권을 잡게 된 절대 권력의 독재자는 스탈린이었다. 1928년 스탈린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국민의 토지와 재산을 국유화하는 일이었다. 소련 국민 사이에서 스탈린의 정책에 불만을 표출했다.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나치당'이 공공연하게 소련을 침공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1934년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비밀경찰 조직을 새롭게 개편한다. 

 

스탈린의 사냥개 '엔카베데(NKVD)'

 

엔카베데는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스탈린에게 방해가 될 정적들을 해임하거나 체포했다. 소련의 모든 치안과 행정 업무를 엔카베데가 수행했다. 

 

1936년 엔카베데의 만행이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스탈린과 엔카베데의 '피의 대숙청'이다. 

 

피의 대숙청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년간 스탈린의 정적과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어진 숙청이다. 

 

# 엔카베데는 소련을 어떻게 탄압했을까?

1. 밀고 시스템

모스크바에서는 60~70 가구를 엔카베데 요원 한 명이 감시하고 있었다. 넓은 지역을 모두 감시할 수 없었던 엔카베데는 사람들끼리 반역 행위를 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밀고 하도록 시스템화했다. 

 

엔카베데는 밀고하면 풀어준다고 하거나 가족들을 미끼로 협박을 했다. 심지어 밀고를 하지 않으면 스탈린에게 충실하지 않다는 의혹으로 가중처벌을 했다. 

 

스탈린은 엔카베데 요원들에게 어마어마한 체포 할당량을 부여했다. 엔카베데 요원들은 할당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밀고 사유는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잡혀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Q. 대숙청 시기, 회사에서 이것을 했다는 이유로 1년 징역형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는데요. 무엇일까요?
지각 20분당 1년의 징역 부과

 

소련 정부는 대숙청 시기 밀고로 인한 희생자의 기록을 국가 기밀로 유지했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 정부가 이에 대한 기록을 공개했는데 3년 사이에 체포된 사람만 170만여 명에 육박했고, 유죄 판결을 받은 160만 여 명 가운데 68만여 명이 사형을 되었다.

 

스탈린은 엔카베데를 통해 반대하면 처형된다는 공포심을 소련 전역에 확산시켰다. 

 

2. 노동 수용소

체포된 사람들 중 처형되지 않은 사람들은 '굴라크'라는 수용소로 끌고 갔는데 이들은 소련 각지의 400여 개 수용소로 흩어져 경제 개발을 위해 강제 노동을 했다. 

 

 

스탈린은 엔카베데 가 잡아들인 노동자들을 전쟁에 이용했다. 범죄자로 선고받은 죄수들로 군부대를 창설했는데 바로 형벌부대였다. 형벌부대는 지뢰를 제거하거나 항공기 공격의 미끼로 내세웠다.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 사이 맺어진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엔카베데는 국내가 아닌 국외에서 활동하게 된다.

 

독소 불가침 조약
향후 10년 동안 소련과 독일은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요청을 받아 폴란드에 군부대를 파견하는데 폴란드는 소련군과는 전쟁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지면서 소련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폴란드 동부 지역을 손쉽게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폴란드군 약 45만 명을 사로잡았다. 스탈린은 대부분의 포로를 풀어주었지만 폴란드 군대의 장교등 엘리트 군인들은 엔카베데로 넘겼다. 

 

엔카베데는 폴란드 군 간부 출신 포로들을 노동 수용소로 끌고 가 사회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소련의 타협할 수 없는 적'으로 분류했다. 

 

스탈린은 장차 소련 안부에 큰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해 1940년 3월부터 카틴 숲에 포로들을 끌고 가 사살했다. 이 사건이 엔카베데 가 저지른 최악의 악행으로 꼽히는 카틴 숲 대학살이다.

 

| 스탈린의 사냥개 엔카베데의 '카틴 숲 대학살'

엔카베데에게 끌려온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들은 카틴 숲에서 약 2만여 명이 사살되었다. 스탈린은 폴란드의 지식인들을 사살해서 폴란드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미연에 제거했다. 

 

스탈린은 대학살을 저지르고 은폐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계기는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소련을 기습 침공했는데 독일군이 카틴 숲 지역을 점령하면서 학살의 전말이 드러났다. 

 

학살 사실이 알려지자 스탈린은 적반하장으로 독일이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이 되어서야 당시 소련 국가수반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카틴 숲 대학살은 명백하게 소련 비밀경찰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 전쟁 중 국외로 영역을 넓혀가는 엔카베데

엔카베데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 세계에 스파이를 파견한다.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연합국들의 군사 정보까지 수집한다. 엔카베데의 정보망을 구축해 준 소련의 최고 스파이 양성소가 바로 군정보총국이다. 

 

| 역사상 가장 위험한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조르게가 스파이로서 특히 특출 난 분야가 언어 능력이었다. 그는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구사했다. 그는 엔카베데와 군정보총국의 명령을 받고 일찍부터 물밑 작업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6년 전인 1933년 독일 언론사 특파원으로 신분 세탁 후 일본으로 잠입했다.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동아시아의 동향을 파악했다. 

 

일본에서 독일과 일본의 정보를 수집하던 조르게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2년 뒤인 1941년 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한 엄청난 정보를 입수한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소련군은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는데 군사력을 모스크바와 일본에 침략에 대비해 시베리아에 나눠서 배치하고 있던 소련은 조르게가 보낸 긴급한 첩보를 받는다.

 

일본은 당장 소련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

 

스탈린의 조르게의 첩보를 확신하고 시베리아의 군사력을 모스크바에 배치했고 독일군에 대항할 수 있었다. 엔카베데 스파이들의 활약으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다.

 

 

| 영국을 뒤흔든 엘리트 스파이 '케임브리지 5인조'

 

5명 모두 영국인으로 최고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다. 그리고 영국 최고 기관의 요직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표면상 영국의 요원들이지만 모두 소련의 이중스파이들이었다.

 

킴 필비 (1912~1988)
- 영국 MI6의 정보 장교
- 세계 첩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반역 스파이'

 

킴 필비가 소련에 남긴 정보는 동유럽 국가들에 투입된 영국 첩보원들의 신상이었는데 엔카베데는 이 정보를 가지고 수많은 영국 첩보원들을 암살할 수 있었다. 

 

킴 필비가 기밀을 빼낸 방법은 기밀문서 담당자에게 술을 사주며 친분을 형성하고 기밀문서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집에 있던 엔카베데 요원이 서류를 전부 사진 촬영을 했고 킴 필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밀문서들을 다시 반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었던 알바니아는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그러나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난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잦은 폭동이 일어나며 나라가 불안정했다. 영국은 이때를 기회로 삼아 알바니아에서 사회주의를 몰아내려 했다. 

 

영국의 MI6와 미국의 CIA가 협력하여 무장 요원들을 비밀리에 알바니아에 침투시킨다. 폭동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던 비밀 작전이었다. 

 

비밀 작전을 처참하게 실패하는데 킴 필비가 이 작전의 내용은 엔카베데에 유출했고 알바니아군이 무장 요원들의 침투 위치에 미리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CIA와 MI6요원 300여 명이 사살되며 작전은 실패했다.

 

1953년 엔카베데 창설자 스탈린이 사망한다. 후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된다.

니키타 흐루쇼프 (1894~1971)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스탈린의 뒤를 이어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한 소련의 국가 원수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사냥개였던 엔카베데를 해체한다. 1954년 본인을 위한 비밀경찰 조직을 새롭게 창설하는데 바로 '크렘린의 검은손' KGB이다.

 

KGB의 주요 업무는 정보 수집, 반체제 인사 단속, 해외 첩보 등을 담당했다. 냉전시대 서로의 정보가 절실했던 미국과 소련은 첩보 활동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KGB를 만들었다면 미국은 CIA를 창설했다.

 

CAI (Central Intelligence Agency)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이 창설한 미국의 국가 정보 수집 기관

 

 

| 조국 소련을 배신한 스파이! 올레크 펜콥스키

올레크 펜콥스키 (1919~1963)
- 총참모부 청보청국 소속
- 소련인 고위 장교

 

KGB는 펜콥스키의 아버지가 반혁명 세력이었음을 폭로한다. 펜콥스키는 KGB로 인해 승진에 실패하고 충성심까지 의심받게 된다. 이일로 펜콥스키는 소련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CIA에 소련 군사 기밀을 넘기기 시작한다. 

 

펜콥스키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KGB 요원들의 신원부터 탄도 미사일 설계도, 미사일 배치, 핵연료 보관소 등 1급 기밀들을 CIA에 전달했다. 

 

Q. 펜콥스키는 기밀문서를 찍은 필름을 이것으로 위장해서 전달하는데요. 무엇일까요?
사탕상자

 

KGB에 굴욕을 준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쿠바 미사일 사태이다. 1961년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던 CIA는 군사작전을 펼친다.

 

피그스만 침공 (1961)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 전복을 목표로 CIA가 훈련시킨 1,400여 명의 무장 요원을 침투시킨 군사 작전

 

하지만 쿠바 군에 간파당하며 대실패를 한다. 이후 반미 노선을 타며 쿠바는 소련과 동맹을 체결한다. 심지어 소련은 쿠바와 무기 지원 협정을 맺는다. 쿠바에서 핵탄두를 발사하면 8분 만에 워싱턴 공격이 가능해 미국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이 계속되면 쿠바 침공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를 봉쇄하고 대규모 군 병력을 소집했다. 심지어 핵탄두 미사일 배치 후 비상 대기 명령까지 내렸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는 방송을 통해 소련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때 CIA는 펜콥스키를 통해 쿠바 미사일 기지의 실상을 첩보받는다. 

 

- 소련 미사일 성능 형편없음

- 연료 공급 상태도 엉망 

 

이 첩보로 미국은 소련의 미사일 전력에 결함이 많았음을 알게 된다. 펜콥스키의 첩보를 통해 케네디를 소련과 협상을 한다. 미국이 튀르키예에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면 쿠바에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는 협상이 받아들여진다. 

 

쿠바 미사일 사태가 일단락되고 펜콥스키가 덜미를 잡히게 된다. KGB가 기밀 유출을 눈치채고 범인 색출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콥스키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펜콥스키 집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기밀문서를 사진 찍는 펜콥스키가 카메라에 찍히고 1963년 펜콥스키는 KGB에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 CIA에 굴욕을 준 올드리치 에임스

에임스는 CIA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기밀문서를 다루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소련 관련 공작에 접근할 수 있었다.

 

Q. 올드리치 에임스는 갑자기 CIA의 기밀문서들을 KGB에 파는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하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륜으로 전부인에게 줄 위자료 3,500만 원이 필요했다.

 

에임스는 주로 소련 내 CIA가 심어둔 스파이 명단을 넘겼다. 에임스의 정보로 소련 내 CIA 이중 스파이만 최소 10명이 검거되었다. 에임스의 정보 유출로 CIA 첩보망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에임스는 소련으로부터 약 22억을 받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해서 CIA의 감시를 받았다. 감시 끝에 에임스는 KGB 요원과의 접선 현장이 적발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소련 첨단 과학의 비밀 'KGB 기술 첩보'

냉전 시기 과학 기술 분야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뒤처진 소련은 단기간에 미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첨단 과학 기술 첩보에 열을 올렸다. KGB는 라인 X라는 조직을 만들어 소련에게 필요한 연구 개발을 염탐하고 훔치는 임무를 부여했다.

 

KGB의 첩보로 소련의 과학 기술은 크게 발전한다. 1980년대 초 소련은 시베리아 횡단 가스관으로 천연가스 수출 계획을 세운다. 가스관을 만들 기술이 없었던 소련은 기술을 훔치기 위해서 캐나다 업체에 KGB 요원을 파견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CIA는 한 발 앞서 업체를 찾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소련에게 전해지도록 공작을 펼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소련은 CIA의 소프트웨어를 가스관 공사에 사용한다. 

 

1982년 6월 시스템 오작동을 일으킨 가스관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난다. 유사한 사례가 여러 차례 발생하자 소련은 KGB의 첩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외국산 신기술 도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 KGB 몰락을 재촉한 '모스크바 쿠데타'

모스크바 쿠데타 (1991.08.19)
당시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기를 든 보수 강경파가 일으킨 쿠데타

 

쿠데타 중심 세력에는 KGB 수장과 다수 요원이 있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한 뒤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군대를 동원해서 언론을 장악하고 쿠데타 정당화를 시도했다. 

 

시민 수천 명이 모이며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인다. 격렬한 시위에 KGB 간부들도 점차 후퇴하기 시작한다. KGB의 모스크바 쿠데타는 실패하고 KGB 간부들은 공항으로 가는 길에 체포된다.

 

그리고 다양한 요인들로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된다. 소련 붕괴 이후 60년 만에 KGB는 해체된다. KGB의 뒤를 잇는 기구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러시아 안보 관련 정부 수집 및 비밀공작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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