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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그리고 교양

벌거벗은세계사 189회 '재난은 어떻게 도쿄를 세계 도시로 만들었나?'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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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거벗은 세계사 189회 

'재난은 어떻게 도쿄를 세계 도시로 만들었나?'

 

▨ 과거와 혀재의 절묘한 조화! 도쿄

뻘밭 에도가 세계도시 도쿄로 성장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두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자제였지만 탁월한 전투 감각과 리더십으로 일본 열도를 평정해 천하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전국시대
각 지방을 다스리는 수많은 영주들 간 전투와 갈등이 계속된 시기

 

히데요시는 자신들의 영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수많은 영주들을 경계했다. 영주 중에 히데요시의 강력한 라이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시즈오카 포함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였다.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영지는 평야 지대라 농업 생산미가 풍부해 군사를 키우기 적합했다.

 

이에야스의 영향력을 줄이려 히데요시가 한 제안은 시즈오카와 에도의 땅을 맞바꾸자고 한다. 이에야스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히데요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본거지를 에도로 옮긴다.

 

에도로 본거지를 옮긴 이에야스는 뻘밭을 개간하고 상공인들을 불러 모으며 상업과 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이에야스가 에도 발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에 대부분의 영주를 참전시켰지만 이에야스는 예외였다. 덕분에 이에야스는 에도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라이벌 히데요시가 전쟁에 한눈판 사이 이에야스는 역량을 키웠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생각했는데 당시 4살로 너무 어려 자신이 죽은 뒤 반란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후사가 없던 탓에 불임·난임설에 시달렸다. 온갖 노력 끝에 히데요리를 얻게 되었다.

 

Q. 도요토키 히데요시는 후사를 얻기 위해 조선의 이것을 먹었는데 이것은 무엇일까요?
호랑이 - 무장들에게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해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지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호랑이 고기가 기력에 좋다는 얘기가 있었다. 무장들에 의해 조선의 호랑이 여러마리가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1598년 9월 18일 당시 5살 히데요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 임진왜란에서도 패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영주들에게 충성심을 잃기 시작한다.

 

 

▨ 이에야스에게 찾아온 뜻밖의 기회

히데요리의 측근들이 권력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전투가 벌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일본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전투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 중 하나

 

이에야스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머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황으로부터 무사들의 최고 지휘자에게 수여하는 직함인 정이대장군(쇼군)을 부여받는다.

 

최고권력자가 된 이에야스는 에도성을 증축한다. 에도성으로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준다.

 

참근교대제
일본 전역의 영주에게 에도에 올라와 쇼군의 안부를 살필것을 요구하며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면서 생활하도록 규정한 제도

 

일본의 영주들은 반반씩 돌아가며 1년마다 에도에서 생활했다. 250여 명의 영주들을 반강제로 에도에 살게 하다 보니까 에도에 있는 동안에는 군사를 모아 반란이 불가했다. 본거지로 돌아가도 에도에 있는 가족 때문에 사실상 반란이 불가능했다.

 

참근교대제는 예상하지 못한 경제적 성과를 가져온다. 참근교대의 인원은 영주의 권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주들은 임시로 일꾼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참근교대로 인해 에도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참근교대제로 1/4인 약 25만 명 인구가 증가했다. (전성기 에도 인구 약 100만 명 추정)

 

참근교대를 위해 영주와 무사, 상공인 등 전국에서 많은 인원이 에도로 이주했다. 따라서 에도에 거주할 택지가 부족했다. 이에야스는 늘어나는 인구에 에도 땅을 넓히기 위해 간척 사업을 추진한다.

 

▨ 에도의 약 60%를 태운 '메이레키 대화재'

# 도쿄수난사

① 메이레키 대화재

메이레키 대화재는 9일 동안 화재로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로마 대화재, 3일 동안 런던 시가지 대부분을 불태운 런던 대화재와 더불어 세계 3대 대화재로 꼽힌다.

 

1657년 음력 1월 18일 사찰 '혼묘지'에서 시작된 화재입니다. 사찰을 집어삼킨 불기둥은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화염은 사찰, 교도소, 상업 지역과 수많은 주택 건물을 태웠다.

 

 

다음 날 음력 1월 19일 1차 화재 진압 2시간 후 2차 화재가 발생한다. 고이시카와에서 시작된 불은 북서풍을 타고 수백 채의 무사 저택을 태우며 교바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불길은 음력 1월 19일 오후 6시경 2차 진압된다. 두 번째 화재로 교바시 지역에서만 약 26,000명이 사망한다.

 

3차 화재는 고지마치 한 상가에서 발생했고 영주와 사무라이들의 저택까지 태웠다. 음력 1월 20일 오전 8시경 3차 화재는 진압된다. 메이레키 대화재는 세 번의 화재를 끝으로 진압된다.

 

이 화재로 에도의 60%가 소실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사상자만 약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 에도가 화재가 빈번했던 이유

① 겨울철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강한 계절풍으로 인한 건조한 기후

② 급격히 늘어난 인구 때문에 넓은 곳에 지을 수 없었던 주택들 : 한 곳에서 불이 나면 주변으로 번지기 쉽게 주택이 밀집되어 지어진 것

 

메이레키 대화재는 에도에 변화를 주었는데 막부는 에도 곳곳에 방화 대책으로 수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화재가 번지지 못하도록 방화용 제방과 공터를 설치했다. 또 화재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망루'를 설치했다. 화재가 발생할 경우 망루의 종을 쳐서 화재를 알렸다.

 

그리고 지붕 위에 방화용 물을 받기 위한 빗물받이를 설치했다. 그리고 소방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막부 직속 소방대 임무는 주로 에도성과 주요 관청, 성곽 등을 보호했다. 민간 소방대 임무는 거주하는 마을과 상점가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운영했다.

 

Q. 한밤중에 불이 났을 때, 불침번은 10명이 넘는 소방대원들을 한 번에 깨우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을까요?
통나무 배게를 망치로 쳤다

 

불타버린 에도 도시를 복구하며 새롭게 생겨난 일자리들로 농민들이 상경하면서 에도의 인구는 폭증하게 되었다. 이때 새롭게 생긴 사회 계층이 조닌이다.

 

조닌
도시에 거주하며 상공업에 종사하던 상인과 공인 계층을 일컫는 말로 당시 에도 인구 대다수를 차지

 

약 70만 명이던 에도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세계에서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1868)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중심으로 복귀하며 사회 문화 전방위에 걸친 일본의 근대화 개혁 정책

 

▨ 에도가 도쿄로 바뀌다! 메이지 유신

1872년 도쿄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도쿄의 신바시에서 항구 요코하마까지 이어진 노선이 개통되었다. 

 

 

Q. 기차가 떠난 승강장에는 이것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것은 무엇일까요?
신발 벗고 탑승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약 100만 명이던 인구가 1920년 약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도쿄는 당시 전 세계 4위의 인구수를 자랑하는 도시가 된다.

 

② 관동 대지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도쿄의 모든 건물과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교와 수도권 일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다. 일본 최악의 재난으로 꼽힐 정도의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인해 약 1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전소된 가옥만 약 44만 7천 채였다. 관동대지진으로 약 3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건물과 도로는 파괴되고 상업과 행정 기능을 마비되었다.

 

# 재난을 기회로 현대적인 도시로 바꿀 계획을 수립하다

- 도로와 다리를 정비해 넓은 거리로 구획 형성

 

관동대지진으로 만들어진 명소는 쓰키지 장외 시장이다. 니혼바시에 있던 시장을 지진 이후 쓰키지로 이전했다. 넓어진 공간으로 현대식 수산시장으로 재탄생한다.

 

지진으로 도시를 재정비한 도교는 1935년 당시 인구 636만 명을 기록하며 뉴욕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거듭난다.

 

도쿄는 1941년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패배의 전운이 돌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갔다.

 

일본을 무력화시키고 빠른 종전을 위해 미국이 추축국인 일본의 수도 도교와 그 주변을 공습했다. 

 

③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이 시작된다. 공중에서 폭탄 세계가 쏟아진다. 도쿄는 무방비 상태로 폭격을 당한다. 공습이 끝난 후 도쿄는 황폐화된다. 

 

공습으로 인해 수도가 파괴되면 일본 국민들은 전쟁의 공포를 실감한다. 일본이 피해가 컸던 이유는 미국이 사용했던 무기 소이탄 때문이었다. 

 

소이탄
하염을 이용해 장비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탄약
악마의 무기 또는 용의 숨결이라 불림

 

도쿄 대공습 이후 소이탄은 광범위한 파괴 능력과 화재 통제 불가로 민간인 밀집 지역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Q. 당시 많은 도쿄 시민은 불길을 피해 이곳으로 향했다가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요. 이곳은 어디일까요?
강으로 뛰어들었다.

 

불을 피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화염과 연기가 강물까지 밀려들어 강물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해 사람을 익혀버렸다.

 

이 공습으로 도쿄는 약 28만 채의 목조 가옥이 전소되며 40%가 파괴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고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물자나 식량이 부족해진 도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물자를 사고팔기 시작한다. 대공습 이후 신주쿠는 암시장의 중심지로 변신한다.

 

또 암시장으로 유명한 곳이 아키하바라이다. 만화·애니메이션 굿즈와 전자 상점이 어우러진 명소로 오타쿠의 성지로 불린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도쿄가 단기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패전 직후 미국이 자본과 기술을 일본에 공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을 안정시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 아시아에서 중요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해 부흥을 지원했다. 

 

미국이 한국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해 철강, 화학 등의 산업을 재건했다. 당시 미국에서 공여받은 자본과 기술로 일본은 산업 경쟁력을 키웠다.

 

일본은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필요해고 방송 전파를 안정적으로 전달할 높은 송신탑이 필요했다. 1958년에 세워진 도쿄타워는 높이 333m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도쿄타워 건축에 엄청난 양의 철강재가 필요했는데 전차 90량을 해체해 나온 철강 자재 1,300톤을 사용했다. 이 철강재는 도쿄타워에 사용된 철의 약 1/3을 차지했다. 

 

1964년 개최한 도쿄 올림픽은 재난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일본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다. 도쿄는 패전 이후 20여 년 만에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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