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예능 보는 망고예요. 벌거벗은 세계사 70회 오늘의 이야기는 [권모 수술로 일군 금융 커넥션! 메디치 가문]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진 15세기 최고의 금융 재벌, 메디치 가문에 대해 알아볼게요.
출 연 진 : 은지원, 이혜성, 이진호
초대손님 : 케이디, 아드리아나
이야기꾼 :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남종국 교수님
약 500년 전 아트테크를 선도한 가문이 있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가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의 결과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꽃 피울 수 있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직접 후원하였으며 마키아벨리 [군주론]이 헌정된 가문도 메디치 가문이었다.
유럽의 유명한 가문 TOP 3
① 유럽계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②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문가 합스부르크 가문
③ 르네상스를 꽃피운 메디치 가문
당시 시세로 가문의 자산 규모는 약 6,000억 원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돈으로 정치를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고 교황들과 얽히면서 종교까지 관여했다. 놀라운 사실은 메디치 가문이 평민 출신이라는 것이다.
#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피렌체를 장악하였나?



평민이었던 메디치 가문을 부자로 성공 신화를 쓴 인물은 "조반디 데 메디치" (1360~1429)
무젤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12세기경 피렌체로 이주하게 된다. 25세의 조반디는 은행업을 하게 된다. 약 700년 전에도 현대의 은행의 기본적인 업무를 처리했다. 창업 전 조반디는 로마에서 10년간 은행직원으로 일하면서 거대한 돈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피렌체로 돌아온 조반디는 동업자들과 새로운 은행을 설립한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년 교황청에는 한 나라의 1년 예산에 필적할 만큼 엄청난 현금이 유입되었다. 교황청의 현금을 관리했던 게 바로 피렌체의 은행들이었다.
#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교화청 전담 은행이 되었나?
발다사레 코사라는 한 인물이 메디치 은행을 찾아오게 되는데 교황이 되기 위한 막대한 활동 자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발다사레 코사가 요구한 금액은 약 100억 원이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조반디는 약 100억 원을 빌려주면서 인생일대의 큰 베팅을 한다.
1410년 계획대로 발다사레 코사는 교황에 선출된다.
그렇게 메디치 은행은 피사 교황청 전담 은행이 된다. 그러나 5년 후 위기를 맞이하는데 발다사레 코사가 교황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조반디는 쫓겨난 발다사레 코사의 벌금은 물론이고 머물 곳에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이를 고마워했던 발다사레 코사는 죽기 전 선물을 남기는데..

정답) 손가락

세계 요한의 손가락으로 진위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메디치 가문에 보존이 되어있다. 중세시대는 성자들의 신체 일부가 엄청난 보물로 취급되었다.
1420년 새로 즉위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메디치 은행을 전담 은행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
# 흙수저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최고의 가문이 되었나?
전담은행이 된 메디치 은행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신분을 뛰어넘어 피렌체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인물이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사후 국부 칭호를 받기로 했다.
30대 초반인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증여된 재산은 한화로 약 1,800억 원이었다. 교황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코시모는 교황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업이었던 직물업을 수입, 제조, 수출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늘어난 교역량만큼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설치했다.
코시모가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한 행동은? 가문의 문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중세 가문의 문장은 왕이 귀족 작위와 함께 내려주는 게 관례여서 가질 수 없었다. 이에 코시모는 가문의 문장을 셀프로 제작했다.
# 피렌체 권력을 잡을
뜻밖의 기회?
전쟁 중이던 로마에 엄청난 전쟁비용이 발생하자 이를 빌려준 것이 메디치 가문이었다. 정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돈을 빌려준 메디치 가문에 대해 시민들은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를 견제하던 알비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장악하려는 위험한 야심을 품고 있다며 몰아세워 코시모를 체포한다. 사형에 처하고 싶었지만 코시모의 지지자들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된다.
메디치와 친한 교항이 피렌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코시모의 지지자들로 정부를 채운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돌아온 코시모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피렌체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한다.
코시모는 선거위원회를 매수해 철저한 선거 조작으로 피렌체 정부 구성을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웠다. 마침내 피렌체의 정치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돈으로 매수한 이들이 언제 배신할지 몰라 불안해했던 코시모는 프란체스토 스포르차(1401~1466)에게 막강한 무력을 얻고자 큰돈을 빌려줬다. 그 대가로 코시모는 언제든 군대 지원을 약속받았다.

1469년 겨울, 20살의 나이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로렌초. 로렌초가 수장이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가문이 파치가문(중세시대 이래 피렌체의 귀족 가문으로 15세기 파치가문의 주요 사업은 은행업으로 메디치와 라이벌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을 지켜주던 스포르차 가문의 수장이 죽자 파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을 없앨 암살 계획을 한다. 거사일은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암살장소는 두오모 성당이었다.
Q. 로렌초를 암살하기로 한 용병대장은 갑자기 암살을 그만두겠다며 성당을 빠져나가 버리는데요.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성스러운 성당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포기한다.
파치가문은 성직자들에게 암살을 맡기는데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무려 19번이나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 암살자가 로렌초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재빨리 피한 로렌초는 살아남았다. 사건 당일 피렌체에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로렌초의 명령으로 암살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피렌체 정부 관리들은 암살자들을 고문하고 죽인 뒤 시뇨리아 궁에 시체를 내다 걸었다.
분노한 로렌초를 피렌체를 독재 국가로 만들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넣고 죽였다. 이에 교황은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교황의 파문이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최악의 자식들'로 낙인찍혔고 이들에 대한 전쟁과 파괴가 용인됨을 의미했다.
알고 보니, 로렌초 암살 계획에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있었던 것이다. 식스투스 4세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 식구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로렌초를 이를 방해했던 것이다. 로렌초는 교황이 세력이 키우는 걸 경계했다.
교황은 이일을 기회로 삼아 피렌체를 장악하기로 결심하고 나폴리 왕과 협공해서 피렌체를 침공한다. 로렌초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1년 반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흉작과 전염병으로 피렌체의 상황은 점차 심각해진다. 로렌초는 나폴리 왕을 찾아가서 직접 설득하기로 한다. 약 3달 가까운 설득 끝에 나폴리 왕은 군대를 물리기로 한다. 교황도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킨다. 교황은 사과하는 로렌초를 등 떠밀려 받아들이고 파문도 거둬들이게 된다.

정답) 기린

그림을 그린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사람 조르조 바사리(1511~1574)였다. 메디치 가문 사람이었던 바사리 작품임으로 대외 선전용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며 건축가, 미술사가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다양한 작품을 남긴 인물
# 메디치 가문은 왜 문화 예술에 투자하였나?
르네상스 = 이탈리아에서 서유럽까지 확대된 그리스. 로마 고전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한 문화운동
이때 메디치 가문도 예술과 학문에 투자를 시작하게 된다. 로렌초가 예술에 투자한 이유는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로렌초를 찾아온 예술가 중에 한 명이 미켈란젤로였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에게 생활비는 물론 인체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시체를 제공하기도 했다.
로렌초가 가장 많이 작품을 의뢰한 인물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메디치 가문이 보티첼리에게 의뢰한 작품 중 메디치 가문의 의도가 노골적인 작품은?

사실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가족사진이다?!?




Q.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한 인물이 음악에 지대한 영행을 미친 최초의 발명품을 만드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피아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피아노가 1720년 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플라톤 아카데미(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문과 문학을 연구하는모임)를 설립한다. 고전까지 수집했던 메디치 가문은 공공 도서관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만든다. 이 도서관은 아름다운 내부와 함께 입구의 계단이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라는 콘셉트로 설계했다.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탐욕은 중죄였다. 재물을 탐하는 은행가인 메디치 가문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천국에 가기 위해 메디치 가문이 선택한 방법은...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드는데 16년간 엄청난 후원을 하게 된다. 상인들은 천국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교회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중세 유럽에서 돈, 권력, 문화, 종교 모든 것을 장악했던 메디치 가문
한 시대를 장악했던 권력은 18세기 무렵 끊어지고 만다. 마지막 상속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메디치의 예술품을 모두 국가에 기증한다. 조건은 '단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못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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