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사진기의 등장은 화가들에게 엄청난 위기였다. 초상화의 역할이 사진기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사건으로 유명해지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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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의 낙찰 가격은 약 1억 1천7백만 달러 (한화 약 1,600억 원)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폐쇄적인 가족 분위기에서 외롭게 자랐던 고흐.
미술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고흐. 11살 당시에는 평범했던 수준의 그림 실력이었다.
1869년 16살이 된 고흐는 큰아버지의 소개로 '아트 딜러*'라는 첫 직업을 갖게 된다.
아트 딜러 미술 작품을 사고팔거나 미술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
고흐는 '구필화랑'이라는 곳에서 일했는데 학교 생활도 적응을 못했던 고흐가 가장 오랜 기간 일한 직업이 바로 아트 딜러였다. 현존하는 유일한 고흐의 실물 사진으로 19살 때의 고흐 사진이다.
가족과의 소통을 위해 편지에 그림을 그렸던 고흐.
구필화랑에서 일하던 고흐는 23살에 상사와의 불화로 해고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밀레의 삶과 작품에 감동을 받은 고흐는 25살이 되던 1878년 임시 선교사가 되어 벨기에 보리나주로 떠나게 되는데...
고흐가 찾아간 곳은 유럽에서도 악명 높은 탄광지대였다. 탄광지대의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린 고흐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탄광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주는 고흐가 부모님은 광적이라고 여기고 정신병원에 보낼 생각까지 하게 된다.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어버리는 고흐.
홀로 남게 된 고흐를 도와주는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방황하는 형 고흐에게 직업 화가를 해보라고 한다. 동생 테오는 아트 딜러로 일하면서 그 당시 연봉 12,000프랑(당시 연봉 약 1억 2천만 원)을 벌고 있었다.
테오는 형 고흐에게 편지와 함께 생활비로 약 145만 원을 보내주었다.
# 27세 고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고흐가 사랑에 빠진 사촌누나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아버지는 결국 고흐를 집에서 내쫓는다.
Q. 헤이그에서 고흐가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심한 반대를 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흐가 시엔이라는 매춘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고흐가 사랑한 시엔의 모습은 슬픔이 가득하다. 이 여성에게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온 고흐였다. 돈을 벌지 않았던 고흐는 동생의 돈으로 시엔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까지 돌보면서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 갔다. 그 결과 시엔은 다시 매춘을 하게 되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
구원 환상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삶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
30세 고흐의 노력이 집대성된 작품은 '감자 먹는 사람들'
그들이 노동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음식을 얻었는지를 그리고 싶었다. 나는 문명인들과 분명히 다른 이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다.
1884~ 1885년 겨울 동안 고흐는 40여 점이 넘는 농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그림 인생에서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가난한 노동자들.
본인의 만족과 달리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고흐의 그림. 고흐는 다양한 색채를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간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벨 에포크*의 시대였는데 현대의 도시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던 도시였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9세기말~20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 풍요가 깃들고 예술과 문화가 번창한 시기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고지대여서 집값이 쌌고, 다른 지역에 비해 싼 술 압생트*가 유명했다.
압생트 벨 에포크 시절 유럽에서 유행했던 증류주로 '녹색요정', '녹색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유명
화가들은 사진의 탄생으로 사실적은 그림보다는 현장에서 느낀 감동을 화폭에 담으로 노력했다. 이때 탄생한 말이 인상주의*이다.
인상주의 (색채 묘사의 혁명)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실적인 묘사의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화가 스스로 빛과 색을 새롭게 해석하는 미술 사조
정숙함이 미덕이던 시절에 나체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은 파격 그 자체였다.
자유롭고 빠르게 그려진 붓터치. 모네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빛을 남기고 싶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반응은 냉혹했다.
이내 화풍을 인정받으며 파리를 대표하는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고흐의 그림에는 변화가 찾아온다.
고흐는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았어도 늘 부족했던 것이 물감이었다.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며 더욱 귀해진 물감을 내주는 조력자가 등장하는데...
탕기 영감은 테오와 함께 고흐를 응원했던 든든한 지지자였다. 특이한 점은 일본의 판화(우키요에*)로 만든 풍속화가 있다는 점이다. 고흐는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일본 미술을 접한 경험이 있고 고흐가 파리에 왔을 당시에는 이미 박람회를 통해 일본 미술이 전파되었던 상황이었다.
우키요에 17~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유행하던 풍속화의 형태
고흐는 영감을 얻기 위해 35살에 프랑스 남쪽 아를로 떠나게 된다.
노란 집이 마음에 들었던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보내달라고 한다.
Q. 고흐의 이 행동으로 테오는 집값을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임대를 허락하는데요. 과연 어떤 행동이었을까요? 테오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란 집으로 만들어버린 고흐
고흐는 37년 사는 동안 37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런 고흐에게 아를에서 처음 생긴 작업 공간은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안정감을 찾은 고흐는 아를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게 된다.
이 카페는 고흐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면서 벽을 노란색으로 바꾸고 카페 이름도 반고흐로 바꿨다고 합니다.
당시 고흐가 아를의 풍경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튜브 물감의 발명입니다.
Q. 튜브 물감이 개발되기 전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그릴 때 물감을 보관한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의 방광으로 물감을 보관 - 야외에서 사용 시 자주 터지는 불상사가 발생
고흐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인 고갱에게 친근감을 느꼈고 자신이 꿈꾼 화가들의 공동체에 고갱이 합류하길 바랐다. 공동체에 관심이 없던 고갱은 아를에 내려가면 생활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아를에 가기로 결심한다.
Q. 고흐는 자신이 직접 준비한 선물들로 고갱의 방을 장식하는데요. 고흐가 준비한 선물은 무엇일까요? 고갱을 위해 준비한 '해바라기'
이 고갱을 위한 네 점의 해바라기 작품은 단 7일에 걸쳐 완성되었다. 고갱이 유년 시절을 보낸 남아메리카에 서식했던 해바라기는 고갱에게 해바라기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꽃이었고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고흐가 고갱을 위해 해바라기를 그린 것이다.
둘의 성격차이를 보여주는 그림.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갈등은 심해졌다.
고갱이 그려 준 고흐의 초상화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팔리고 있다는 소식에 아를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고갱. 고흐와의 다툼 끝에 파리로 고갱이 떠나고 발작을 일으킨 고흐가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버린다.
"화가로서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보이는 그림"
정실질환이 계속되던 고흐는 1889년 5월 그의 나이 36세에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입원 후에도 반복된 불안과 발작 증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림을 그렸던 고흐.
병실에서 동이 트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
고흐는 아를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기간 약 1년 반의 시간 동안 150점의 그림을 그리는데.. 4일에 한 작품씩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돈 문제와 관련해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50년을 살면서 1년에
2,000프랑을 쓴 사람이라면 평생 나는 10만 프랑을 쓴 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10만 프랑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로서 평생 100프랑짜리 1천 점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동생 테오는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 빌럼 반 고흐라고 지었다. 서양권에서는 가족의 이름을 아이에게 물려주며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조카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는 말에 기쁘면서도 자신처럼 불행할 것을 걱정했던 고흐는 조카의 탄생을 기원하며 그림을 선물하는데 그 작품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서양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려준다고 하네요.
1884년 살롱 아티스트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되는 고흐의 작품.
전시회에 형이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형의 그림은 잘 배치되어 있고 아주 잘 보여
많은 분들이 나에게 형의 칭찬을 부탁하러 왔어 고갱은 형의 그림이 전시회의 핵심이라고 말했어 -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 중 -
고흐 생전에 유일하게 판매된 그림
당시 안나 보쉬 구입 가격은 약 400만 원이었는데 현재는 보험 가입비만 약 950억 원이다.
1890년 7월 27일
낡은 총을 들고 옥수수밭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한 고흐. 하지만 고흐는 빗나가버린 총알에 피를 흘리며 숙소로 돌아오게 된다. 여관집 주인이 고흐의 상태를 보고 의사를 불렀지만 이미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테오는 다음날 고흐를 찾아오는데..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테오의 곁에서 숨을 거둔 고흐. 이때 고흐의 나이는 37세였다. 형이 떠나고 6개월 후 동생 테오도 지병으로 사망한다.
고흐가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의 공이 컸다.
고흐 사망 15년 후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에서 고흐의 회고전이 열리게 되는데 이때 약 480점의 고흐의 그림이 선보이게 된다.
누구나 고흐의 그림을 보도록 요한나는 국립 미술관에 해바라기를 판매한다.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어 고흐의 작품이 공공재가 되면서 고흐의 이름이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이미 전시회 당시 고흐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좋은 상태여서 고흐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빛을 볼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한나는 이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책을 발간한다. 사람들은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고흐 작품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요한나는 테오의 무덤을 고흐의 옆자리로 옮겨 형제애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고흐 주니어는 삼촌 반 고흐의 미술관을 개관한다. 1973년 암스테르담에 개관한 반 고흐 뮤지엄.
고흐는 10년간의 짧은 화가 인생동안 800여 점의 유화와 약 1,3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기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에 매달렸던 빈센트 반 고흐는 그림을 위해서 인생과 영혼을 모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