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163회
'명나라를 망친 희대의 폭군들'
| 폭군 계보의 시작! 제10대 황제 정덕제
14살에 왕위에 오른 정덕제는 나랏일에는 관심 없고 사냥하러 나가기 일쑤였다. 정덕제가 특히 좋아하는 놀이는 전쟁놀이였다.
# 명나라를 망친 첫 번째 폭군 《정덕제》
- 괴상한(?) 취미
정덕제는 활을 잘 쏘는 환관들을 모아 하루 종일 전쟁놀이에 전념했다. 16살 정덕제의 놀이 스케일은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Q. 정덕제는 자금성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황실 정원에 새로운 놀이공간을 건설했는데요.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정덕제가 1507년에 만든 동물원 '표방'
정덕제는 표방 건설 5년 동안 은 24만 냥 이상을 투입해 200여 채의 가옥과 밀실, 사냥터를 조성했다. 은 24만 냥은 당시 2만여 명의 사람이 1년을 먹고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정덕제는 맹수와 겨루기를 즐겼는데 맹수 한 마리당 240명의 병사를 배치했다.
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표방에 머물렀던 정덕제는 표방을 여색을 탐하는 공간으로 바꾼다.
- 여색에 빠지다!
정덕제 측근 중에는 방중술에 능한 이슬람 출신 친위대 우영이 있었다.
방중술
규방에서 남녀가 성을 영위하는 기술
이슬람 여인들이 이쁘다는 우영의 말에 정덕제는 기뻐하며 서역의 여인들을 표방으로 데려오라고 명한다. 이렇게 정덕제가 서역 여인들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간신과 환관들은 서역 여성들을 바치기 시작했다.
표방은 여색에 미친 황제의 놀이터로 전락한다. 정덕제를 여색의 길로 이끈 인물은 환관 유근이었다. 정덕제에게 여인을 바쳐 환심을 산 유근은 사례태감(명나라 때 환관 중 최고 지위)이라는 자리까지 얻게 된다.
정덕제에게 실권을 넘겨 받은 유근은 조정을 손에 쥐게 된다. 관리들은 실세인 유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바쳤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를 참지 않았던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알게 된 정덕제는 유근의 집을 수색한다. 유근의 집에서 나온 금은보화 황금 24만 정, 은 500만 냥에 이르렀다. 이금액은 명나라 재정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정독제가 유근을 용서할 수 없는 물건도 나왔는데 황제의 도방을 위조한 가짜 옥새와 허리띠 등 다양한 물건이 발견된 것이다. 환관 유근에게 내려진 형벌은 칼로 베이는 능지형이 내려진다. 3일동안 칼질을 당한 유근은 사망한다.
유근이 사라지자 정덕제를 국정에서 멀어지게 한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은 장수 강빈이다. 둘의 관계는 연인이라는 설이 많았는데 정덕제는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까지 즐기고 있었다.
강빈은 정덕제에게 색다른 제안을 한다. 몽골 세력으로부터 침입당하는 일이 잦아지던 때 강빈은 오랑캐를 몰아낼 겸 밖에서 전쟁놀이를 하자고 한 것이다. 정덕제는 주수라는 인물에게 오늘날 참모총장직을 하사하는데..
Q. 정덕제의 명으로 선부진을 지키게 된 인물이 '주수'라는 소식을 듣자 명나라 조정은 깜짝 놀랐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수 = 정덕제 (정덕제의 본명은 주후조로 주수는 부캐명이다.)
정덕제는 주수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 자신에게 관직을 내렸다.
- 부캐 놀이(?)
양자강 이남(강남) 장시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정덕제는 자신의 부캐인 주수에게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반란지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정덕제는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풀어준 후 다시 잡는 소동극을 벌이게 된다.
술을 먹고 강에 빠져 감기에 걸린 정덕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오고 한 달 내내 심한 감기를 앓다가 1521년 30대의 나이로 사망한다.
정덕제는 공주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이가 없었다. 황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던 이유는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전쟁 놀이를 하느라 변방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후사를 보지 못했다.
| 가정제는 왜 폭군이 되었을까?
가정제는 정덕제의 사촌형제였다.
# 명나라를 망친 두 번째 폭군 《가정제》
- 도교에 미치다.
도교
신선 사상을 기반으로 노장사상, 유교, 불교 등을 받아들여 형성된 종교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 등 초인적인 힘을 얻으려는 학문적 탐구가 존재
도교에 빠진 가정제는 자금성 안에 도교 제단을 설치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몰두했다. 가정제는 악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1533년 가정제의 첫째 아들이 태어나지만 곧 세상을 떠나고 가정제는 순수 도교가 아닌 미신에 빠지게 된다. 더 제사에 몰두한 몇 년 후 가정제는 아들은 연달아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한 인물 덕분이라고 믿었는데 그 인물은 도사 '소원절'이었다.
소원절을 완전히 믿어버린 가정제는 그를 예부상서(나라의 제사, 사신 및 빈대 접대, 과거 등을 담당)에 임명한다. 가정제가 의지했던 소원절은 8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 이후 가정제는 더욱 미신에 빠지게 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소원절의 제자 도사 '도중문'이었다.
- 불로장생을 꿈꾸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가정제는 영원히 사는 불로장생을 꿈꿨다.
Q. 도중문은 가정제를 위한 불로장생약에 어린 궁녀들의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불로장생 특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 '어린 궁녀들의 생리혈'
도중문은 어린 궁녀들의 생리혈, 비상, 수은 등 각종 재료를 넣고 불로장생약을 제조했다. 갈수록 착취가 심해지자 궁녀들은 가정제 암살 계획을 세운다. 준비가 부족했던 궁녀들은 목을 졸랐으나 금방 풀리게 되고 비녀를 찌르려던 순간 병사들에게 들켜 능지처참 형을 받게 된다.
가정제는 정무에서 손을 놓은 채 한 궁전에 틀어 박혀지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도교 사원과 행사를 치르며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가정제가 미신에 빠져 국정에서 멀어지는 사이 경술의 변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경술의 변
몽골 튀메드부의 알탄 칸이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포위한 사건
알탄 칸이 명나라에 꾸준히 요청했던 것은 명나라와의 교역이었다. 폐쇄적인 명나라의 기조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가정제는 알탄 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알탄 칸은 명나라의 국정을 넘나들면서 약탈과 파괴를 감행했다. 그래도 문을 열지 않으니 약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한 것이다.
베이징 코앞까지 진격해온 몽골군에 명나라는 조공을 통한 무역을 허가한다. 이에 몽골군은 2년 만에 포위를 풀고 되돌아간다.
| 왜구의 침략
무역을 원했던 왜구는 수시로 중국 남해안을 공격했다. 왕강경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명나라 장경이 왜구 1,900명을 성공적으로 섬멸한다. 1555년 70여 명의 왜구를 죽이는 명나라 4,000명이 전사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가정제가 도술에 빠진 결과 명나라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불로장생을 꿈꿨던 가정제는 성분을 알 수 없는 특효약을 장기 복용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1567년 가정제는 5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가정제의 세째 아들 융경제가 명나라 12대 황제가 된다. 융경제는 자금성 안에 있던 도사들을 몰아내고 명나라의 기강을 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동안 단절되었던 해외 교역을 재개한다.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은이 명나라로 모였다.
융경제의 재임을 오래가지 못했는데 재임 5년 만인 30대 중반에 일찍 죽음을 맞이한다. 1572년 명나라를 망조에 들게 만드는 최악의 황제가 등장하는데...
# 명나라를 망친 세 번째 폭군 《만력제》
8살에 즉위한 제13대 황제 만력제는 일찍 세상을 떠난 두 형을 대신해 4살부터 태자 자리에 올랐었다. 만력제가 성장할 때까지 뒷받침해 주는 인물이 있었는데 만력제의 스승이자 지금의 총리인 내각 수보였던 정거정이다.
장거정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만력제의 스승
이중적인 행보로 만력제에게 충격을 준 인물
만력제는 스승을 존경해 장거정의 말에 반항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만력제의 신뢰를 얻은 장거정은 개혁정치를 단행해 나갔다. 장거정은 토지 조사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고 탈세하는 땅을 적발해 재장 수입을 늘렸다. 그리고 모든 세금은 은으로 통일했다.
장거정의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만력제가 19세가 되던 해에 장거정이 세상을 떠난다. 장거정이 사망하자 반발했던 대신들이 장거정의 집안을 조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조사를 해보니 만력제는 장거정의 부정부패를 알게 된다.
만력제는 스승의 비리에 충격을 받고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배신과 대신들의 비판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만력제는 회의와 모든 강연을 중단한다. 그리고 모든 일을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조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황제의 업무 파업
만력제는 47년 재임동안 30년은 업무를 보지 않았다. 주요 직책이 비어도 충원을 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 때는 생명을 다루는 재판은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았는데 만력제는 어떤 재판도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만력제는 재판을 열어주지 않았다.
- 국고 탕진
1584년 만력제가 20대 초반일 때 천수산 명당자리에 무덤을 짓기 시작한다. 6년 동안 계속된 작업에 매일 2~3만 명의 장정이 동원되었다. 만력제는 1588년 자신의 무덤을 짓는 현장을 시찰한 적을 빼고 30여 년 동안 자금성을 나간 적이 없었다.
황제는 매일 밤 반드시 술을 마시고 마실 때마다 취하고 취할 때마다 화를 낸다.
술에 취한 만력제는 환관과 궁녀를 가죽채찍으로 때려 죽이는 일이 잦았다. 재임기간이 길어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 만력제가 적극적으로 한·일 '임진왜란 파병?'
임진왜란 (1592~1598)
명을 정벌하러 가는 길을 내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을 거절하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며 일어난 전쟁
갑작스러운 일본의 기습에 위기에 몰린 조선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재정적으로 부담이었던 대신들은 조선의 요청을 반대한다.
Q. 구전에 따르면 만력제는 꿈에서 '이 인물'의 계시를 받고 임진왜란에 파병을 결정해다고 전해지는데요. 그 인물은 누구일까요? 삼국지속 의리의 상징인 관우
만력제는 조선에 군사 17만 명을 보내고 3만명이 사망했고 조선이 농사를 못 짓고 있다는 소식에 쌀 100만 석을 지원한다.
임진왜란 기간 명나라의 지원 규모는 (추정치) 은 800만 ~ 1,700만 냥을 사용했다고 한다. 1,700만냥은 명나라의 1년 치 재정수입과 맞먹는 금액으로 명나라 재정적 부담이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정이 바닥나자 만력제는 지방으로 세감을 파견해 수탈을 명령한다. 환관을 이용한 지방 세금 수탈은 전국적인 민란으로 번져갔다.
1618년 전쟁 발발
후금 vs 명
만력제는 이때도 정무를 보지 않았고 대신들의 지원 요청도 거절했다. 1620년 만력제는 48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24년 동안 3명의 황제가 즉위했지만 276년간 이어진 명나라의 완전히 기울어버린 국운은 만주족 청나라에게 무너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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