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179회
'유럽지도를 바꾼 최초의 세계대전! 30년 전쟁'
로마 가톨릭 vs 신교
30년 전쟁
| 국가 위의 종교! 유럽을 지배한 '로마 가톨릭'
로마 포함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교황령을 지배했던 인물이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었다. 교황은 부, 권력, 군대 동원까지 가능했다. 교황의 위상이 강력했던 이유는 유럽 종교는 로마 가톨릭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약 1,200년 동안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지배했다. 962년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으며 시작된 나라가 신성로마제국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정치, 문화, 민족이 다른 집단을 하나로 묶은 연합체라고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이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분열되기 시작한다. 16세기 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증축 과정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을 바로 '면벌부' 판매였다.
면벌부( Indulgentia)
죄에 따르는 벌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중세 가톨릭교회가 발행했던 증거
많은 사람들이 벌을 면하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면벌부를 구매했다. 면벌부 판매에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1517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에 반발
쇄신을 요구하며 시작된 개혁 운동
종교개혁은 마틴루터가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마틴루터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유일한 종교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게 된다. 세금을 감당하던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은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결국 루터파 교회라는 독자적인 교회 세력으로 독립한다. 루터가 지핀 종교개혁의 열기는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 열기는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난 신교를 탄생시켰다.
유럽 신교 확산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장칼뱅이었다.
- 루터파 : 성경을 중심으로 믿음만 가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 칼뱅파 : 구원 여부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수백 년에 걸쳐 유럽의 종교는 여러 종파로 나뉘게 된다. 당시에는 성경을 아무나 읽지 못하도록 사슬에 묶어 놨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배포했다. 그러자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시각이 탄생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신교가 악마의 집단이라 비방하고 신교는 교황을 악마로 묘사했다.
Q. 교황을 풍자한 그림에서 상반신을 여성으로 묘사한 이유는?
교황의 성적인 타락을 비꼬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표현
영국은 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수형과 화형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살해당한 신교도 수가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반대로 신교 측의 로마 가톨릭을 향한 폭행 사건도 발생했다. 종교 갈등이 가장 심했던 곳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종교 분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으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55년 신성로마제국 내 로마 가톨릭과 신교 세력을 규합한다. 현재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화의 이다. 종교회의를 통해 로마 가톨릭과 신교 세력 간 종교에 대한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 신성로마제국의 종교 분열 시작! 보헤미아 왕국
14세기 중후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경제 수도이기도 했던 보헤미아는 파리와 로마에 대항하는 도시로 주목받았다. 상업의 발달로 보헤미아 귀족들의 입김이 강했다. 보헤미아의 대다수의 귀족과 백성들은 신교 신자였다. 그런데 보헤미아의 왕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보헤미아의 귀족은 왕을 압박했고 왕은 신교를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이 종교 자유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 왕은 페르디난트 2세였다.
페르디난트 2세 (1578년~1637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을 동시에 역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보헤미아 종교 갈등의 불씨
신교 교회 건축을 중단시키고 신교 세력의 항의 집회 강제 해산 등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Q. 신교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의 최측근들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요?
페르디난트 2세의 최측근을 창밖으로 내던진 신교 귀족들
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페르디난트 2세를 인정하지 못하는 신교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한다. 선출된 새로운 왕은 프리드리히 5세였다.
프리드리히 5세 (1596년 ~ 1632년)
팔츠 선제후국의 제후이며 신교 세력이 선출한 보헤미아의 왕
페르디난트 2세는 반란을 일으킨 신교 세력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페르디난트 2세 vs 프리드리히 5세
둘의 대립으로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인 30년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신교 세력은 1만 6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보헤미아를 방어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페르디난트 2세의 거점인 오스트리아의 빈을 선제 공격한다.
프리드리히 5세 선제 공격으로 페르디난트 2세는 주변국을 끌어들여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한다. 신교 연합군은 로마 가톨릭 연습군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신교 연합군보다 로마 가톨릭 연합군이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 30년 전쟁은 왜 세계대전이 됐나?
① 영토확장
로마 가톨릭 연합군 중 영토 확장의 목적으로 참전한 나라가 있었다. 스페인은 페르디난트 2세와 전쟁 중 모종의 거래를 하는데 보헤미아를 점령하면 스테인이 내륙 진출에 필요한 영토인 알자스를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바이에른 공국은 프리드리히 5세의 땅인 팔츠 선제후국을 노렸다. 각자 목적을 가진 나라들의 합류로 로마 가톨릭 연합군의 전투력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신교 연합군은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용뱡 부대를 고용한다. 용병 부대는 국가와 종교와 상관없이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용병 부대는 싸우는 척하면서 후방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전쟁이 오래될수록 신교 연합군 수장인 프리드리히 5세는 자금이 부족해진다. 심지어 용병 부대는 적군으로부터 돈을 받고 길을 열어주었다.
용병들은 백성들에게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했다. 뜯어낸 기부금이 모자라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용병들은 전쟁의 승패보다 약탈에 치중해 백성들 사이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보헤미아 내 전투로 신교 연합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하여 용병 부대와 전쟁을 버텨나갔다. 1620년 신교 연합군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을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전쟁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Q. 신교 연합군은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지휘관들 때문에 전투에 차질을 빚었는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프라하 술집에서 놀다가 전투에 지각한 지휘관들
지휘관들의 지각으로 전투 준비가 되지 않은 신교 연합군은 로마 가톨릭 연합군은 대응이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달려들어 신교 연합군을 중앙에 몰아넣었다.
지휘관의 지각으로 신교 연합군은 결국 교전 1시간 만에 4천여 명이 사망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반면 로마 가톨릭 연합군은 7백여 명의 병력만 잃고 고지를 점령한다.
로마 가톨릭 연합군의 승리로 페르디난트 2세는 왕좌를 되찾았다. 이로 보헤미안 주동자 26명은 처형당하고 반란에 참여한 680여 명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스페인은 주변국의 견제로 '유럽 진출 요충지'인 알자스를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라 교통로로는 이용이 가능해졌다.
프리드리히 5세의 땅 '팔츠'는 대부분이 바이에른의 차지가 된다.
스페인의 침공을 받을까 두려워진 신교 국가들은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중 1625년 전쟁을 선포한 나라는 상업을 통해 부를 얻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덴마크였다.
② 첨단 무기 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보헤미아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1625년 로마 가톨릭 연합군 측 지휘관으로 임명돼
'신성로마제국의 명장'으로 불렸다.
쫓겨난 보헤미아 신규 귀족들이 소유했던 땅을 헐값에 구매한다.
Q. 발렌슈타인이 보헤미아 땅을 대거 사들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땅을 사면 자연스레 함께 따라오는 세금을 납부할 주민이 있기 때문에 확보한 세금으로 무기 전을 준비
발렌슈타인은 군세라는 세금을 거둬 군수 공장을 세웠다. 무기와 화약 등 군수품을 생산해서 병력의 주요 이동 경로에서 보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덴마크는 4년 동안 전쟁을 치르는데 로마 가톨릭 연합군의 체계적 무기 보급에 무너져 패배했다. 덴마크의 뒤를 잇는 발트해의 또 다른 강자는 바로 스웨덴이다. 이때 스웨덴군을 이끌던 인물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였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북방의 사자왕'이라 불리는 스웨덴 국왕
역사상 위대한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
그는 북방의 사장왕으로 불릴 만큼 용맹하고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받았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강대국 스웨덴을 만든 인물이었다. 구스타브 2세는 1630년 신교 연합군을 결성해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력에서 열세인 신교 연합군은 개량한 무기로 무장했다. 이전 무기는 길이가 길고 무거워 받침대가 필요한 머스킷이었다면 구스타브 2세는 총기의 60~70%를 기동성이 높은 개량 머스킷으로 교체했다.
당시 대포는 약 3,000kg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웠는데 구스타브 2세는 기존보다 약 1/10 가량 작은 대포를 제작했다. 구스타브 2세는 이 대포로 사거리는 줄어들었지만 기동성을 활용한 전략을 구사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전력》
로마 가톨릭 연합군 | 신교 연합 | |
참전국 | 신성로마제국 황제군 스페인 바이에른 공국 ... |
스웨덴 작센 선제후국 ... |
군대규모 | 병력 약 31,400명 대포 약 27문 |
병력 약 40,150명 대포 약 66문 |
사상자 수 | 약 16,600명 | 약 5,500명 |
30년 전쟁의 무기전이 세계대전급 피해를 낳았다. 이 전쟁은 로마 가톨릭 군의 승기를 꺾고 역습에 성공한 신교 군의 대승리로 끝이 난다.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 가톨릭 연합군이 다시 우세해졌다.
신교 연합군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구스타브 2세가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사망해 버린 것이다. 막강했던 적장의 죽음으로 로마 가톨릭 연합군은 기세를 얻었다.
전쟁 초중반 프랑스는 신교 연합을 막후에서 지원만 했는데 뒤늦게 30년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바로 패권 경쟁 때문입니다.
③ 가문 간 패권 경쟁
1589년 이후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가 집권을 했는데 강력했던 부르봉가의 경쟁 상대가 바로 합스부르크 가였다.
부르봉 왕가
1589년 앙리 4세를 시작으로 약 250년간 프랑스를
지배한 왕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절대 권력의 명문 가문
프랑스는 믿었던 스페인마저 패배하자 합스부르크가 에 고립될 것을 걱정해 견제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유럽 최강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30년 전쟁에 참전한다. 이때 프랑스를 이끌었던 인물이 리슈리외 추기경이다.
아르망 장 뒤 플레시스 리슐리외 (1585년 ~ 1642년)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자 프랑스 재상으로
3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이끌며
'강철 발톱의 이리'로 불린 인물
프랑스는 같은 로마 가톨릭인 합스부르크가를 공격하는 것에 명분이 없었지만 국익과 패권 경쟁을 위해 로마 가톨릭 연합에 선전 포고한다.
# 프랑스 리슐리외의 필승 전력
1단계 : 동맹 구축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네덜란드와 가장 먼저 동맹을 맺는다. 1637년 스웨덴과도 동맹을 체결한다. 리슐리외는 작센 가문 출신 군지휘관 겸 공작을 포섭하려 한다.
Q. 리슐리외는 작센 가문의 공작을 포섭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리슐리외는 공작이 땅에 욕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작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소문을 낸다.
"프랑스 편에 서면 땅을 준데..."
2단계 : 스파이 작전
스페인에 스파이를 보낸 프랑스는 전쟁에 관한 과장되거나 헛된 정보가 퍼지게 한다.
3단계 : 내부 반란 지원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전쟁 중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전쟁 등으로 오랜 기간 과도한 세금을 걷고 있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민들이 스페인 내에 대대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다.
1640년 스페인 땅 내부에 있던 포르투갈이 독립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는 포르투갈 쿠데타 세력과 동맹을 맺고 군대와 자금을 지원한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 핵심 세력인 스페인의 전력을 약화시킨 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1643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벌인 운명을 건 전투 격전지는 로크루아이다.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을 궤멸시킨다.
신교 연합군의 스웨덴 역시 기세를 몰아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를 함락시킨다. 패전을 거듭한 신성로마제국 황제군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다.
신교 연합의 핵심인 프랑스와 스웨덴은 유럽 패권 국가로 급부상한다. 반면 합스부르크 가는 해상 패권을 상실한다.
로마 가톨릭 연합의 패배로 끝난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30년 전쟁의 전후 수습을 논의한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평화 회의
베스트팔렌 조약 주요 내용
- 로마 가톨릭, 신교의 각 계파 모두 평등한 지위 인정
- 프랑스와 스웨덴의 영토 확장
- 신성 로마 제국 내 각 제후국의 주권 인정
-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 인정
# 30년 전쟁의 결과
1. 가톨릭의 절대적 힘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유럽
2. 신교 연합의 핵심국 프랑스 & 스웨덴의 영토 확장
3. 신성로마제국 내 제후국들이 각자의 주권을 인정받게 됨
신성로마제국은 300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며 붕괴된다. 30년 전쟁은 현재 유럽 국경선의 기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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