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135회
'장미정원의 비밀'
1975년 부산 수영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고급별장 지대가 있는데 젊은 남자가 목재공장 회장님 별장을 통 크게 구입한다. 그 별장은 학산별장이라고 불렸다. 1975년 당시 매매가가 1억이었다.
이 젊은 남자는 정원에 장미를 가득 심었고 독일 셰퍼드를 5마리도 키웠다. 그리고 집에서 엽총으로 사격 연습도 했다.
학산 별장 주인은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고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수도검침원뿐이었다.
| 마약왕 성장기 밀수로 큰돈을 벌다
이황순은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에 뜻이 없었는지 중퇴를 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부산은 일거리도 먹거리도 풍부해 활기찬 도시였다. 이황순은 부산에서 조직폭력배에 조직원이 되었다.
이황순이 들어간 조직은 1950년대 피난민 건달 7명으로 시작한 조직 '칠성파'였다. 칠성파의 초대 두목은 이경섭인데 칠성파 조직을 물려받은 이경섭의 손아랫동서 이강환은 배짱이 좋아 부산일대의 모든 조직을 흡수한다. 마침내 1980년대 부산 조폭계의 넘버원 세력이 된다.
칠성파의 성장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는데 일본의 야쿠자였다. 당시 야쿠자는 한국에서 지부 역할을 해줄 조직을 찾고 있었는데 칠성파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강환 역시 세력을 넓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돈이 필요했던 이강한은 부산의 유흥가를 장악해 돈을 쓸어 모으기 시작한다. 1970년대 부산 일대에 유행했던 사업이 밀수였다. 세금 없이 몰래 밀수를 해서 파는 사업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중에서 일본 제품이 인기가 많았는데 국제시장은 일본과 가까워 암암리에 밀수품을 판매했다.
칠성파의 이황순은 부산에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무역선을 이용하기로 한다. 음식을 들여오는 업자와 손을 잡고 음식대신 밀수품을 배에 싣고 들여왔다. 이황순은 조직원들을 분업화해서 조직적으로 밀수사업을 했다. 그러다 정부에서 밀수를 5대 악으로 정하고 수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밀수 적발 시 최대 형량은 사형이었다.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검찰은 밀수현장을 덮치는데 1972년 2월 이황순을 체포한다. 이황순은 징역 4년 벌금 1,400만 원을 선고 받고 마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백색 가루와의 첫 만남
이황순은 수감 이듬해 1973년 출소한다. 이황순은 폐결핵 진단 후 형 집행정지를 받아 출소할 수 있었다.
형 집행정지 조건
1.치료 후 다시 수감
2. 제한된 주거지를 벗어나지 말 것
출소 후 이황순은 일주일 만에 사라진다. 사라진 이황순은 경남 진주에 나타난다. 그곳에서 이황순은 교수라고 불리는 히로뽕 밀조 기술자를 만난다. 이황순은 교수에게 1:1 교습을 받았다.
히로뽕 제조 시 염산 때문에 발생하는 악취가 엄청난데 그래서 제조하는 최적의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 돼지 사육장이다.
감기약을 제조하던 일본의 제약회사는 필로폰의 발견하게 되고 필로폰이 들어간 피로회복제를 만든다. 1970년대 일본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군인에게 각성효과가 뛰어난 필로폰을 먹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 사람의 상당수가 필로폰에 중독되었고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로폰을 제조하는 사람에게 사형까지 선고했다.
하지만 돈이 되는 마약사업을 포기하기 싫었던 일본의 야쿠자는 필로폰을 제조할 곳으로 한국을 선택하게 된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에서 히로뽕을 제조하던 조선인들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부분 부산에 살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야쿠자는 그 기술자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부산은 물이 좋고 겨울에도 따뜻하기 때문에 부산은 히로뽕을 제조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대만에서 원재료를 수입하고 한국에서 제조 후 일본에서 판매하는 일명 화이트 앵글이 완성되었다.
이황순은 불과 2년만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79년 12월 인천항
밀수 루트는 부산항에서 인천항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젊은 윤검사는 인천으로 발령이 나고 금괴를 도둑맞았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신고자의 직업은 밀수범이다. 밀수범이 신고한 이유는 금괴도둑의 정체가 형사였기 때문이다. 수사 끝에 금괴 도둑인 형사를 잡았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금괴 밀수의 윗선을 찾아 조직 전체를 소탕할 계획을 세운다.
밀수범이 김구 선생의 수행원인 독립운동가였던 걸 알고 있던 검사는 밀수범에게 태극기 앞에서 애국가를 10번 부르고 오라고 한다. 밀수범은 눈물을 흘리며 알고 있는 걸 털어놓겠다고 한다. 대만에서 오는 대나무 선이 밀수선이라고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검사는 만다린호를 찾게 된다.
만다린호에서는 많은 밀수품과 염산에페드린이 가득 들어있었다. 만다린호는 단순한 밀수선이 아닌 대만과 한국을 잇는 히로뽕 원료 밀수선이었다.
1973년 형집행정지로 석방 후 6년간 행방불명된 이황순이 히로뽕 원료 구매자로 드러났다.
원료구입책을 잡는 것은 마약 피라미드의 최상선을 잡는 것이다. 경찰은 이황순의 학산 별장에 잠복을 하는데 수도검침원으로 위장한 이황순의 부하를 놓친다.
경찰과 검찰이 이황순의 별장으로 출동하는데 이황순은 엽총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찰은 가족을 통해 협상하기로 한다. 이황순을 설득하기 위해 들어간 형을 본 이황순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총구를 얼굴로 가져갔는데 이를 본 형이 몸을 던져 막았다.
이황순이 자백 하기를 바랐지만 이황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황순 별장에서 장미가 심어져 있던 곳 아래 지하 공간에는 밀조 기계장비들이 있었다.
이황순은 히로뽕을 제조해 당시 300~400억을 벌어들였다. 이황순은 리어카로 마약을 운반했고 집에 직원들이 들어올 때는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위장해서 들어왔다.
이황순도 히로뽕 중독자로 하루에 6번씩 히로뽕을 주입했다고 한다.
| 마약왕의 비밀
이황순을 체포한 직후에 이상한일이 벌어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보사부로 지금의 보건복지부 마약단속반에 속하는 곳이다. 단속반 공무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황순이 검거되기 2년 전에 투서 한 통이 도착했는데 한때 이황순과 같은 조직원이었는데 배신을 당했다며 이황순에 대해 제보를 하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이황순에게 뇌물을 받았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제보는 모두 사실이었다. 1973년 폐결핵 진단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은 것도 교도소 의무과장에게 뇌물을 주고 가짜 진단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당시 이황순에게 뇌물을 받은 공무원은 13명이었다.
1980년 이황순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마약과의 전쟁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황순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사람이 여러 조직으로 존재했고 부산에 수사가 집중되자 조직원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70년 후반부터 국내에도 점차 마약 중독자들이 늘어갔다.
| 이황순의 근황
이황순의 근황은 알려진게 없고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만약 생존해 있다면 지금은 아흔 쯤의 나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