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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럽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반인륜적인 살육전이 벌어진 중세시대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는 이 전쟁은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트럼프 선언에 반대하는 시위가 빗발치며 유혈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2,700여 명이나 발생했다. 2000년 9월 이스라엘 극우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이슬람인 vs 유대인의 충돌이 발생해 수백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도시 예루살렘의 비극은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됐다?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추악한 전쟁!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11~13세기 사이 서유럽의 기독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약 200년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기독교를 믿는 십자군 vs 신흥 강자 이슬람 세력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명분은 신이 상지 예루살렘의 탈환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중요한 성지로 여겨왔다.
| 평화가 무너진 예루살렘! 전쟁의 서막이 열리다
11세기 무렵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던 이슬람의 셀주크 튀르크족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금지시켰다. 당시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왕조는 이게 그치지 않고 기독교 세력인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기로 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국가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슬람 세력에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면 서유럽도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이 기회에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싶어 했다. 당시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를 그대로 둔다면 기독교의 분열은 더 극렬해질 것이 분명했다. 교황은 동서의 분열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싶어 했다. 그리고 교황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
과거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수많은 제후들의 영토로 이뤄진 국가 연합체. 중세 시기 교황이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성직 서임권 등을 두고 수많은 알력 다툼이 발생함.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위협했고 로마의 교황은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견제해야 했다. 교황은 십자군 파견을 위해 연설을 하는데 이 연설이 바로 클레르몽 공의회 연설이다.
클레르몽 공의회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렸던 카톨릭 교회의 회의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신의 왕국을 약탈한 것입니다.
만약 사탄에게 사로잡힌 타락하고 경멸스러운 민족이
신을 찬양하며 기독교의 이름을 영광으로 여기는
국가를 이긴다면 이보다 더한 수치가 있겠습니까!
고로 이교도들과의 전쟁, 즉 나설 가치가 있는 전쟁
마땅히 승리로 끝내야 할 전쟁에 부디 출정하십시오!
- 클레르몽 공의회 연설 중 -
교황이 연설을 마쳤을 때 사람들은 '데우스 로 불트(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를 외쳤다.
Q.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혜택을 약속했는데요, 어떤 혜택일까요? 대사 (남아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하여 주는 일)
교황은 벌을 면제해 주고 십자군으로 명예롭게 죽은 형제들은 하늘에서 불멸의 보상과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1096년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이 시작된다.
| 제1차 십자군 전쟁 (1096년 ~ 1099년)
제1차 원정길에 나선 최초의 십자군은 약 10만여 명에 달했다. 원정군 중에 절반 정도는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적 없는 평민들이 많았다. 이들을 가리켜 민중 십자군이라 부른다.
Q.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민중 십자군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큰 난관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무엇이었을까요?
예루살렘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앞사람만 따라갔던 민중 십자군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배를 이용해 민중 십자군을 이슬람 세력이 있는 영토로 내보냈다. 하지만 먹지도 쉬지도 못한 민중 십자군은 대부분 몰살당했고 포로가 되었다.
정규 십자군도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십자군의 수는 약 6만여 명이었다.
약 6만 여명의 정규 십자군을 보고 불안감을 안게 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정규 십자군과 협약을 맺는데 군비를 대 줄 테니 예루살렘에서 얻는 땅은 자신들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정규 십자군은 땅에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정규 십자군은 니케아를 거의 점령하기 일보 직전에 비밀리에 비잔티움 제국이 나타나 니케아에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협상해 니케아에 비잔티움 깃발을 꽂았다. 비잔티움 제구고가 십자군원정대는 서로를 믿지 못했다.
- 배신과 약탈 그리고 학살! 십자군 시작부터 어긋나다?!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보다 전리품을 챙기려는 영토 싸움으로 변질된다. 명분 없이 변질된 십자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안티오키아 전투이다. 안티오키아는 10km가 넘는 기다란 성벽에 400여 개의 망루로 둘러싸인 곳으로 철통방어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십자군은 8개월간의 공격에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지 못하고 지쳐가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적을 매수한 십자군은 땅과 보물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성 안에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슬람 지원군은 순식간에 성 밖을 둘러싸고 십자군 원정대를 성안에 가두었다. 상안에는 8개월간의 공방으로 모든 식량이 이미 바닥나있었다.
Q. 안티오키아에서 중요한 한 물건을 찾게 되면서 십자군의 사기에는 변화가 생기는데요, 어떤 물건일까요?
롱기누스의 창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다. 십자군 원정대는 롱기누스의 창의 발견으로 침체되었던 사기가 올라간다. 열세의 상황이었지만 십자군 원정대는 200여 명의 중무장한 기병을 앞세워 이슬람군을 무찔러 버렸다.
식량난을 겪고 있던 십자군 원정대는 악티오키아를 나와 주변 지역을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다녔다. 1098년 12월 십자군은 당시 '마라'라 불린 한 마을을 발견한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십자군은 마라인의 시신을 훼손해 먹었다. 십자군은 신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인을 행했다.
- 출정 3년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1099년 6월 십자군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십자군은 한 달여 만에 이슬람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마자 신의 이름을 앞세워 이슬람인을 잔혹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땅을 약탈하는 것으로 끝이났다.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이 약탈만 하고 돌아갈 줄 알았지만 십자군은 땅을 차지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이슬람 세력은 에데사를 탈환하고 다른 점령지도 되찾고자 했다. 에데사가 무너진다면 다른 지역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1147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예루살렘은 십자군을 조직해 또다시 전쟁에 나선다.
| 제2차 십자군 전쟁 (1147년 ~ 1148년)
제2차 십자군 전쟁은 끝났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계속해서 항전 중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기세가 등등했는데 전쟁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
이슬람의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살라딘은 이슬람의 기술과 문화를 전쟁에 활용했을 뿐 아니라 1174년 이집트 통치권을 가진 살라딘은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118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손쉽게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프랑스에 파병을 요청한다.
| 제3차 십자군 전쟁 (1189년~1192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강에 빠져 사망한다. 황제를 잃은 신성 로마제국의 군대는 자신의 나라로 복귀한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오기 전부터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 교황의 중재로 십자군 전쟁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참전 서약을 지켰다며 프랑스로 조기 귀국해 버린다.
잉글랜드 리처드 1세는 홀로 군대를 이끌며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나갔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라이언하트 리처드 1세였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귀국한 프랑스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에게 연락해 리처드 왕이 죽었을지 모르니 자신과 영국 왕의 자리를 차지하자고 제안한다.
그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급하게 협상을 시작한다. 십자군은 점령 지역을 모두 반환하고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가받는다. 급하게 잉글랜드로 귀국한 리처드 1세는 두 번째 대관식을 치른 후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고 한다.
평화협정 이후 26년간 안전한 예루살렘 순례가 가능했다.
| 제4차 십자군 전쟁 (1202년 ~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 인물은 바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였다.
인노첸시오 3세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 중세 기독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
인노첸시오 교황은 자신은 신의 대리자이고 국가의 통치권력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했다. 그는 신정정치를 위한 첫걸음으로 예루살렘 재탈환을 하기로 한다.
신정정치
국가의 통치 권력은 신에게 나온다는 사상에 따라 교황의 지도 아래 국가를 통치하려는 형태
1193년 살라딘의 사망 후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교황은 이때가 적기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기독권 세력을 모두 동원해 가장 강력한 십자군을 만들고자 했다.
왕들은 교황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고 결국 일부 영주들만이 예루살렘 재탈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전쟁은 시작부터 문제를 드러냈다.
- 십자군 원정의 첫 목적지는 이집트(?)
원정의 첫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였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가 그 사이 이슬람 세력 중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를 가려면 배가 가장 빨랐는데 프랑스는 당시 많은 배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십자군은 지중해 무역 국가 베네치아와 손을 잡기로 한다.
당시 베네치아는 아시아와의 무역으로 돈을 벌고 있어 선박을 제작하는 노하우가 많아 십자군에게 배를 조달하기에 적합했다. 베네치아 지도자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1년 치와 선박을 제공할 테니 자신에게 8만 5천 쾰른마르크(현재 가치 약 2,215억 원)와 전리품을 동등하게 나눠달라고 제안한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제안을 수락한다. 출항을 앞두고 십자군은 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예상 모집 인원은 3만 3천여 명의 병사였는데 실제 인원은 1만여 명만 참전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은 이 인원으로는 베네치아에게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돈을 못 받게 생긴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던 자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전쟁을 십자군이 도와준다면 채무기한을 연장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Q. 베네치아의 '자라' 침공제안을 십자군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라는 같은 기독교를 믿고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 같은 기독교 국가를 침공하다!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은 자라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자라는 사절단을 보내 평화 협상을 원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협상은 실패한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의 대의명분은 잊고 같은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
교황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껴 십자군과 베네치아에 판문을 내린다. 십자군은 사절단을 보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자 십자군의 파문을 철회한다. 베네치아는 여전히 판문 상태였지만 십자군과 함께하는 것은 허락한다.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 공격을 제안받는데 제안한 사람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도망친 전 황태자 알렉시오스 4세였다. 큰아버지에게 황제자리를 빼앗긴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알렉시오스 4세는 자신의 황위를 되찾아 준다면 그 대가로 군대를 지원해 주고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하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성지에 기사를 내어주고 20만 쾰른마르크(현재 가치 약 5,000억 원)를 지불하겠다고 한다.
다수의 십자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국 십자군 탄생의 원인 중 하나였던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다!
무차별 공격을 가하자 십자군에게 유리해진 상황이 벌어지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입성에 성공한다. 당시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는 모든 돈과 재물을 들고 달아나버린다. 십자군은 약속대로 이사키오스 2세에게 황위를 주었고 아버지가 죽자 알렉시오스 4세는 황위에 오른다.
이제 알렉시오스가 약속을 지킬 차례인데 큰 아버지가 모든 돈을 가지고 달아나버려 십자군에게 돈을 지불할 수 없었고 세금을 과하게 걷자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은 비잔티움 성직자들과는 상의된 약속이 아니었다. 비잔티움 지국의 귀족들은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해 버리고 십자군에게 돈을 갚을 수 없다고 한다.
1204년 4월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총공격을 가한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비잔티움 제국은 항복하며 십자군이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십자군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이집트는 안중에 없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십자군을 저주한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은 본질을 잊고 추악한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본질을 잃은 십자군은 교황의 말도 듣지 않고 콘스탄티노플 인근에 라틴 제국을 세워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기독교인들만 공격한 제4차 십자군 전쟁은 처참히 막을 내린다.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점령 후 영토를 늘려나간다. 이 영토를 기반으로 한 베네치아는 해상 강국으로 떠오른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승자는 십자군도 기독교 세력의 확장도 아닌 베네치아 뿐이었다.
|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제5차 십자군 전쟁 당시 성직자 프란치스코는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주장했다. 그는 목숨이 위대로울 수 있는 상황에도 이슬람 지도자를 설득하기 위해 연설했다. 그 연설을 들은 이슬람 람 군대는 프란치스코를 죽이려 했지만 이슬람 군대와 달리 이슬람 지도자는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워 선교하도록 허락했다.
1209년 창설된 프란치스코회는 지금도 그의 뜻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후 1291년 십자군 전쟁은 지지부진하다가 완전히 막을 내린다. 약 200년간 전쟁을 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하였고 왕권이 강화되고 상인들의 권위 또한 상승하였다. 유럽에는 기근과 페스트를 겪었고 백년전쟁이 끝나던 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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