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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그리고 교양

벌거벗은세계사 135회 줄거리 《고려거란전쟁》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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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거벗은 세계사 135회는 드라마로 본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족은 주변 부족들을 약탈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을 바로 말이었다. 그들에게 말은 이동수단이자 전쟁의 수단이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135회 줄거리

 

Q. 말을 잘 다루는 거란족에게는 이들만의 특별한 전투 기술이 있었는데요. 과연 무엇일까요? 말을 타고 뒤돌아 활 쏘는 거란족
* 파르티안 샷 : 말을 탄 기수가 이동 중 몸을 뒤로 돌려 추격해 오는 적에게 화살을 쏘는 기술

 

거란족은 특유의 기마술과 궁술을 통해서 스스로를 강철과 칼의 민족이라고 부르며 전투력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 최강대국의 초석을 다진 '아율아보기'의 등장

기록에 따르면 야율아보기는 키가 2m에 달하고 힘이 엄청 강했다고 한다. 916년 부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면서 거란 최초의 국가를 만든다.

 

야율아보기
8개의 부족을 통일해 거란을 대제국으로 만든 거란 최초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유목민의 정체성을 잇기 위해 수도를 옮기며 국가를 운영하기로 한다. 

 

① 유목민족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② 강인한 전투력 또한 유목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

 

여러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야율아보기는 한족의 문자인 한자를 참고해 거란의 문자를 창제한다. 나라가 안정기를 찾아가자 야율아보기는 영토를 확장하기로 한다.

 

남쪽의 중원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로 한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나타났다가 없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5대 10국 시대
907년 ~ 979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5개의 왕조와 여러 지방장권의 흥망이 거듭된 정치적 격변기

 

야율아보기는 중원으로 영토 확장이 여의치 않자 발해를 공격하기로 한다. 거란은 전쟁 시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발해의 수도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923년 228년의 역사를 가진 발해를 멸망시킨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대국이 된다.

 

926년 전쟁 후 귀국하던 야율아버기가 55세의 나이로 돌연 병사한다. 

 

Q. 당시 거란은 특별한 장례 풍습으로 황제를 모셨는데요. 어떤 방법일까요? 미라로 만든다

 

제포
거란만의 독특한 장례 풍습으로 황제의 시신을 말린다는 의미

 

당시 거란은 저승에서 재생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육체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 만리장성을 넘은 최초의 북방민족 거란!

936년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세워지는데 이를 도운 나라가 바로 거란이다. 거란이 고마웠던 후진의 왕은 연운 16주라고 만리장성 이남의 땅을 준다. 이 땅은 농경지로 거란이 안정적인 경제력을 갖고 성장하는 바탕이 된다. 

 

- 거란의 거침없는 행보를 막은 라이벌 등장

라이벌은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인데 거란족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연운 16주는 수도와 너무 가까웠고 중원의 땅이 거란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송나라
960년 ~ 1279년 조광윤이 건국한 왕조로 차츰 세력을 확대하면서 결국 분열되었던 5대 10국을 통일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두고 거란과 10년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다 거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 야율융서가 등장한다. 송나라는 12살의 어린 왕 야율융서와 섭정을 여성인 어머니가 한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전쟁에 올인하게 된다.

 

- 거란 vs 고려 원수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

고려는 같은 민족인 발해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로 생각했다. 거란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보낸다. 

 

Q. 왕건은 거란에게 선물 받은 낙타 50마리를 어떻게 했을까요? 다리 아래에 50마리의 낙타를 매어두고 방치

 

만부교 사건
942년 고려 태조 때 우호 관계를 위해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만부교 아래에 굶겨 죽인 사건 

 

이 사건 이후로 거란과 고려의 고류는 약 40년간 단절된다.

 

 

 

송나라와 전쟁을 앞두고 거란은 후방의 고려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다. 거란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고려를 소손녕을 앞세워 침공한다. 이 전쟁이 바로 993년 고려 6대 왕 성종 때 벌어진 1차 고려거란전쟁이다.

 

거란군과 고려군은 봉산군에서 처음 맞붙는다. 이 전쟁에서 거란이 승리한다. 소손녕은 고려에 항복할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낸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을 하자는 파와 영토를 떼어주자는 파로 나뉜다. 이때 이를 반대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희이다. 서희는 거란군과 승부를 보자고 한다.

 

서희 (942~998)
고려의 문신 정치가이자 외교가

 

서희는 거란이 남하는 하지 않고 항복만 하라고 하는 거란에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접 소손녕을 찾아가 단판을 하게 된다.

 

서희의 외교담판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에게 고려가 강동 6주의 여진족을 토벌하게 해준다면 거란과 조공책봉관계를 맺겠다고 한다. 이는 강동 6주의 땅을 고려가 갖겠다는 의미이다. 거란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서희는 협상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동 6주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1차 고려거란전쟁은 전략적 외교로 고려가 승리한다.

 

거란은 고려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999년부터는 송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 5년 후 1004년 전연의 맹약을 체결한다.

 

전연의 맹약 (1004년)
송나라가 거란에 매년 대량의 폐물을 보내고 형제 관계를 맺은 정전 협정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이 승기를 잡게된다.

 

거란의 야율융서는 어머니의 사망으로 자신의 황제로써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1009년 고려에서는 그때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내연남인 김치양과 손을 잡고 목종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알게 된 고려 장군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다. 

강조의 정변
1009년 강조에 의해 고려 7대 왕 목종이 폐위되고 8대 왕 현종이 옹립

 

 

 

강조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목종은 폐위시킨다. 고려의 8대 왕으로 현종을 세운다. 당시 거란과 고려는 조공책봉 관계로 왕이 바뀌면 고란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야율융서는 이를 자신의 허락 없이 왕을 바꾼 고려를 침략할 명분으로 삼는다. 

 

야율융서는 직접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온다. 거란에 맞서기 위해 나선 장군은 양규이다. 

 

거란군 40만명 vs 고려군 3,000명

 

 

| 명장 양규 신화의 시작 '흥화진 전투'

투석기를 쏘는 거란군에 불화살을 쏘며 대응한 고려군.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흥화진의 전투에서 양규의 거센 항전으로 거란군은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한다. 

 

야율융서는 전략을 바꿔 통주로 간다. 통주에는 고려군 최고 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30만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고려의 추정 인구가 300만 ~ 400만 명이라고 하니 30만 명의 대군을 배치한 것은 나라의 운명을 건 총력전이라고 봐야 한다.

 

- 거란 기병에 대비한 고려의 비밀병기 등장!

고려는 거란의 기병을 대비해서 검차(수레에 창이나 칼을 꽂어 방어력을 높인 무기)라는 무기를 준비한다. 

 

Q. 검차의 앞에는 (           )할 목적으로 (            )를 형상화했는데요. (            )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말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호랑이를 형상화한 검차

 

검차를 앞세워 벽을 세우면 거란의 기병은 물러나야 했다. 거란은 검차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이 아닌 보병을 보냈다. 통주와 곽주가 뚫리고 고려군은 수도의 마지막 보루인 서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전쟁 33일 차 1010년 12월 19일 거란군은 서경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수도인 개경으로 향한다.

 

과거 거란군은 발해를 함락했을 때 수도로 진격해 약 2주 만에 왕의 항복을 받은 경험으로 고려도 수도인 개경으로 향했던 것이다. 

 

- 개경을 점령한 거란에 닥친 뜻밖의 문제

현종은 피난을 떠나고 거란군은 12일 만에 개경에 입성하게 된다. 야율융서는 현종을 잡아야 하는데 거란군은 회군을 해야 한다고 한다. 

 

* 회군을 주장한 이유

① 날씨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한 음력 1월 1일은 추위가 정점에서 물러날 때로 여기서 더 시간을 끌게 되면 얼었던 압록강이 녹아 회군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② 약탈시기 

음력 9월은 수확한 농작물 약탈에 최적의 시기로 12월에는 회군을 해야 하는데 고려와의 전쟁이 너무 길어져서 1월을 넘기고 있었다.

③ 유목민족의 특성

따뜻해지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해의 유목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야율융서는 명분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데 그때 고려의 신하가 찾아와 현종은 이미 수천 리 밖으로 피해 따라잡으실 수 없으니 거란이 군사를 되돌리시면 현종이 친조를 청할 것이라고 한다. 야율융서는 그 말을 듣고 개경 점령 열흘 만에 퇴각을 한다.

 

야율융서는 개경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이 사건으로 고려 초기 역사서와 문헌들이 전부 사라진다. 양규장군은 김숙흥 장군과 힘을 합쳐 1,7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약 7번의 전투를 치르며 3만여 명의 고려인 포로를 구출한다. 

 

 

 

그러다 회군하는 야율융서의 군대와 마주치는데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던 양규 장군은 1,7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군대와 싸운다. 1,700여 명의 용맹한 고려군은 고려를 위해 싸우다 전원 전사한다.

 

그렇게 제2차 고려거란전쟁은 거란군의 회군으로 끝이 난다.

 

음력 1011년 2월 23일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온다. 모두 불타버린 개경을 본 현종은 재건을 위해 힘쓴다. 현종은 친조를 강요하는 야율융서에 아프다며 친조를 거절한다. 이에 야율융서는 강동 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지만 현종은 이도 거절한다.

 

| 고려의 운명이 걸린 3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야율융서는 이를 명분으로 강도 6주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1018년 12월 거란군의 명장 소배압은 전쟁이 끝난 지 8년 만에 3차 고려거란전쟁을 일으킨다.

 

소배압이 상대할 고려군의 명장은 70대의 강감찬 장군이었다. 강감찬 장군은 현종과 함께 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한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노릴 것을 미리 예측하고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삼교천에 군사들을 매복시킨다. 적을 한 번에 쓸어버리기 위해 소가죽을 이용해 둑을 만들어 거란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 거란군을 막기 위한 고려의 비책 ① 소가죽을 이용한 수몰 작전

소가죽을 이용해 댐을 만들어 강물을 막아 놓고 적들이 오면 수몰시키는 작전이었다. 강강찬의 작전은 성공하는데 적들의 수의 너무 적어 이상함을 느낀다. 고려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소배압이 주력부대를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소배압의 목표는 처음부터 개경으로 들어가 현종을 잡는 것이었다.

 

소배압은 2차와 달리 고려군을 따돌리기 위해 험난한 내륙길을 선택한다. 이제 개경에 누가먼저 도착하는지 속도전이 된다.

 

현종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성을 지키며 왕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 거란군을 막기위한 고려의 비책 ② 청야전술

청야전술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 물자와 식량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말 그대로 개경을 초토화시킨다. 현종은 보급품이 없다면 거란군이 퇴각할 것이라 예상했다. 계속되는 현종의 항쟁으로 거란군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강감찬 장군의 부대를 쫓아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배압은 회군을 명령하게 된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군을 귀주로 몰면서 고려의 모든 병력을 귀주에 집결시킨다. 

 

- 3차 고려거란전쟁의 종지부 귀주대첩

강감찬이 벌판에서 전투를 한 이유는 거란의 연이은 침략에 고려의 군사력이 줄어든 상황에 강감찬 장군은 거란이 또 침공할 것을 걱정해 성에서 나와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이다.

 

전투를 벌이던 그때 고려의 정예군 1만여 명이 합류를 한다. 검차+기병+보병 조합으로 거란군을 둘러싸고 공격하게 된다. 이에 거란군의 전열이 무너지며 군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한다.

 

거란군이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1019년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난 26년간의 고려거란전쟁.

 

이후 거란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거란에 불만이 많았던 여진은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와 손을 잡고 거란을 1125년에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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