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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그리고 교양

벌거벗은세계사 132회 '유비, 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by 드라마 보는 망고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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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드라마 보는 망고예요.

동양 고전의 절정 삼국지!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손권 등 난세의 영웅들의 대업은 바로 천하통일이었다. 그런데 통일을 이룬 사람은 이들이 아닌 사마의였다. 사마의는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삼국지연의' 때문에 후대에 배신의 아이콘이 된다. 벌거벗은 세계사 132회 줄거리 리뷰 시작합니다.

 

 

유비, 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 삼국시대의 서막 '황건적의 난'

한나라 후반기에는 부패한 관리들과 무능한 황제를 등에 업은 환관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백성들을 끊임없이 수탈당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횡포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는데 그게 바로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의 난
후한 말기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두른 농민들이 일으켰으며 삼국시대 개막의 큰 원인이 된 반란

 

황건적들은 전쟁과 약탈을 일삼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난세에는 반드시 영웅이 나타나는데 촉나라의 유비, 위나라의 조조 그리고 오나라의 손권이다.

 

황건적의 난으로 한나라가 혼란했던 시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조조는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아버지를 살해한 관리에 대한 보복으로 벌인 서주대학살이다.

 

서주 대학살
서주자사 도겸이 아버지를 죽인 것을 빌미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해 토벌한 사건

 

조조는 관리와 상관없는 민간인들까지 학살했는데 그 수가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조는 무자비한 성격에도 곁에 둘 인재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조조는 사마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  7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다.

 

 

 

| 사마의가 관직을 거절한 진짜 이유?

사마의의 가문은 한나라를 세운 공신 가문으로 대대손손 관직에 있었고 관직에 있던 사마의의 아버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사마의는 8명의 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조에게 사마의를 추천한 인물은 후한 말 조조의 휘하에서 신임을 받던 책사 순욱이었다. 사마의가 궁금했던 조조는 사마의에게 관직을 내리는데 사마의는 이를 거절한다. 당시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관직을 거절하는 행위는 중죄에 해당했다.

 

Q. 사마의가 죄를 짓지 않고 조조를 거절하기 위해 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관직 거절이 허용되는 경우 ① 본인이 지병이 있는 경우 ② 부모님이 편찮은 경우
사마의는 관직을 거절하기 위해 풍비(관절염)에 걸려 꼼짝도 못한다고 했다.

 

꾀병을 의심한 조조는 사람을 보내 사마의를 감시하게 했다. 사마의는 조조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눈을 피했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게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조조와 주군관계가 되고 패망할 시 자신의 가문도 같이 패망하기 때문이다.

 

조조는 그 사이 더욱 세력을 키워 한나라 조정에서 가장 높은 관직인 승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손권의 강동 지역을 정벌하기로 한다. 그 때 사마의의 이름을 떠올리며 다시 사마의를 부른다.

 

이번에도 사마의가 오지 않으면 감옥에 가둬라!

 

 

29살의 사마의는 고집을 꺾고 조조의 신하가 된다. 당시 조조는 자신의 뜻에 반기를 들면 가족까지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여 사마의가 조조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Q. 사마의를 만난 조조는 이것 때문에 오히려 사마의를 경계하게 되는데요. 이것을 무엇일까요?
사마의의 관상이 낭고상이여서 였다. (몸통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180도 돌려서 뒤돌아보는 이리) 이리를 닮은 낭고상은 겉과 속이 다르고 주인을 배신하는 역적, 역모의 상이다.

 

자신의 경계하는 조조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조조의 눈치를 보며 그의 말에 절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마부처럼 말이나 가축을 돌보는 일까지 직접 담당했다. 이런 행동에 조조는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조조는 스스로를 위나라의 왕으로 칭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 사마의는 어떻게 삼국지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① 끝까지 참는다

위나라와 촉나라의 국경에 위치해 중요한 지역이던 한중은 촉나라의 북쪽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비가 없는 틈에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중을 방어하기 위해 유비가 돌아오는데 한중에 도착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사마의는 이 기회에 촉나라까지 쳐들어가자고 조조에게 제안을 한다. 유비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면 제압하기 힘들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조조는 한중을 얻었는데 촉나라까지 치는 건 과욕이라고 거절한다. 이때 조조의 나이는 이미 60살이 넘었다. 사마의는 조조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이제 늙었다며 탄식했다.

 

 

 

② 안 싸우고 이긴다

유비는 조조가 지배하고 있던 한중을 2년간의 전투로 되찾는다. 그렇게 되자 조조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방 제후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는 반란을 제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을 타고 관우가 위나라의 번성을 공격한다. 그 결과 관우는 승리를 거두고 번성을 차지하게 된다.

 

빨리 관우를 공격해서 번성을 찾아야 하는데 세상을 호령하던 조조도 늙고 나약해져 수도를 옮기자고 한다. 조조의 신하들은 아무도 반대를 못했는데 사마의가 반기를 든다. 사마의는 수도를 옮기지 말고 배후의 적을 이용해 관우를 치자고 한다. 바로 오나라의 손권을 이용하기로 한다.

 

관우가 지키고 있는 형주지역은 과거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승리하면서 손권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한 땅이었다.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적벽대전
조조에 대항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싸운 전투

 

 

사마의는 이 사실을 알고 형주지역을 미끼로 손권을 설득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사마의는 관우를 이기고 번성을 되찾기 위해 조조에게 손권과의 협상을 제안한다. 

 

손권이 몰래 관우의 배후를 쳐준다면 위나라가 적극 도울 것이고 만약 관우가 죽으면 형주 땅을 나눠갖자

 

손권은 사마의의 제안대로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고 관우는 형주까지 빼앗기고 손권에게 붙잡히고 만다. 유비의 의형제이자 충신인 관우는 219년 12월 그의 나이 58세에 손권에 의해 죽게 된다. 조조는 싸움에 나서지 않고 관우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하겠다며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릉전투에서 대패하며 유비의 위세는 꺾이고 만다. 사마의 제안은 유비까지 흔들어 촉나라를 기울게 하는데도 크게 작용한다. 

 

이릉전투
촉나라의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명목으로 오나라를 침공하며 발발

 

이 일로 사마의는 위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의 나이 마흔 살에 위나라의 태자중서자와 군사마 직책에 오른다. 

 

220년 조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 왕위에 오른다. 

 

Q.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이 된 후, 사마의가 더 큰 권력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마의가 조비의 스승이었기 때문

 

조비는 즉위 6년 만에 사망한다. 이번에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47세의 사마의는 군부의 중심이 된다. 그 사이 촉나라에서는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이 즉위를 한 상황이었다. 유선은 아버지 유비에 비해 매우 유약하고 무능했다. 

 

유비는 아들이 무능하면 제갈량이 나라를 책임져 달라고 유언했지만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했던 제갈량은 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갈량은 무능한 유선을 대신해서 모든 국정을 봐야 했다.

 

촉나라 - 제갈량, 유선 vs 위나라 - 조예, 사마의 vs 오나라 - 손권

 

한나라를 계승하려 했던 제갈량은 한나라를 짓밟은 위나라 정벌을 목표로 삼았다. 제갈량에게 사마의는 제거대상 1호였다. 

 

 

 

| '사마의 vs 제갈량' 두 라이벌의 숨겨진 진실

- 《맹달의 배신》

맹달은 위, 촉, 오와 국경이 맞닿아있는 신성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촉나라의 영역이었다. 관우를 돕지 않았던 맹달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유비가 책임을 물을까 두려웠던 맹달은 위나라에 투항한다. 맹달은 위나라에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끝까지 맹달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맹달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군이자 삼국지 후반 최고 배신의 아이콘

 

제갈량은 맹달에게 접근해 반란을 일으키라며 종용했다. 맹달은 사마의에게 죽기 전에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를 치기로 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맹달의 반란 계획을 알아채고 서신을 보낸다.

 

제갈량은 그대를 파멸시키고자 하지만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소

 

결국 맹달은 고민하느라 반란을 일으키기로 한 날짜를 놓치게 된다. 그 사이 사마의는 빠르게 맹달을 공격했고 단 16일 만에 사로잡아 맹달을 참수시켰다. 

 

- 《가정 전투》

제갈량은 마속이라는 장수를 아꼈고 그를 사마의의 군대와 맞서 싸우게 했다. 당시 제갈량은 쉽사리 사마의와 싸우지 말고 방어에 집중할 것을 명했다. 사마의를 얕본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전투를 진행한다. 결국 마속은 사마의에게 대패한다.

 

제갈량은 마속의 패배로 북벌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다.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성에 있던 제갈량을 공격하기 위해 사마의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서성으로 진격한다. 수적으로 밀린 제갈량은 전멸의 위기에 처한다.

 

Q. 사마의에게 포위된 제갈량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독특한 행동을 하는데 무엇이었을까요?
거문고 연주하기

 

제갈량은 성문을 열어둔 채 거문고를 치며 사마의를 맞이했다. 제갈량은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사마의의 성격을 꿰뚫어 보고 사마의라면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사마의는 이를 보고 수적으로 우세했는데도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소설에 있는 내용으로 픽션이다. 

 

제갈량은 계속해서 북벌에 실패하고 3년 동안 국력 강화에 힘쓴 후 그리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진격한다. 사마의는 공격에 나서지 않고 수비에만 몰두했다. 전쟁이 오래될수록 원정을 온 제갈량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 사마의 인생 최대 위기 《상방곡 전투》

제갈량은 사마의를 끌어내기 위해 입구가 호리병처럼 생긴 상방곡(호로곡)이라는 계곡에 함정을 설치한다.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촉나라의 군량을 태우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상방곡을 습격한다. 매복해 있던 제갈량은 사마의가 안쪽 깊숙이 들어오자 입구를 봉쇄하고 불화살을 쏘고 횃불을 던지며 설치했던 화약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사마의는 이곳에서 죽지 않고 탈출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맹렬히 타오르던 불이 모두 꺼진 것이다. 사마의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량은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 역시 소설 속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사마의는 다른 지역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소설로 사마의는 제갈량의 지략에 패배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혔다.

 

 

 

③ 사람 속을 꿰뚫어 본다

당시 촉나라의 장수들은 나이가 너무 들었고 유비의 아들 유선은 향락에 빠져있었다. 전쟁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제갈량은 삼국 통일이라는 유비의 꿈을 위해 북벌을 계속 진행하기로 한다.

 

- 마지막 대결 《오장원 전투》

사마의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제갈량은 약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한다. 사마의는 제갈량 군대의 배후를 급습했고 결과 오백여 명의 군사를 죽이고 천여 명의 포로를 잡아 승리를 거두었다. 

 

사마의는 수비에만 집중하고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제갈량의 군대가 군량미가 떨어져 스스로 후퇴하기를 기다렸다. 제갈량은 자급자족을 위해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군량미를 조달하기에는 부족했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유인하기 위한 계책을 마련한다.

 

Q.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이것을 보내는데요. 무엇일까요?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여인들의 장신구를 보내서 수비만 하는 사마의가 겁쟁이라며 도발

 

이에 사마의는 분노했지만 끝내 나가서 싸우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자신을 혹사하면서 일만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본인의 승리를 확신했다. 

 

삼국시대의 가장 뛰어난 책사 제갈량은 결국 통일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0여 일 만에 오장원에서 전사하게 된다. 사마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퇴각하는 촉나라의 군대를 쫓는다. 그런데 눈앞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본 사마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제갈량이 살아있는 줄 알고 사마의는 그대로 달아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갈량을 본뜬 목각인형이었다. 제갈량은 자신이 죽은 후에 사마의가 쫓아올 것을 대비해서 제작해 놓은 것이었다. 이 목각인형 이야기는 소설에만 있는 픽션이다.

 

진실은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더욱 승승장구한 사마의는 예순 살이 되었다. 하지만 위나라 황제 조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아들 조방이 황제로 즉위한다. 당시 조방은 8살이었다. 

 

권력 다툼에서 한 발 물러선 사마의는 견제를 피하기 위해 아픈 척을 한다.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나 정신이 이상한 척을 하고 음식을 섭취 못하는 척했다. 

 

견제가 느슨한 틈에 사마의는 아들들과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고 수도가 비어 있는 순간 약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킨다. 

 

고평릉 정변
249년, 사마의가 반역을 일으켜 위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던 세력을 몰살한 사건. 이 사건으로 사마의가 위나라를 실질적으로 전복시키게 됨

 

이 정변은 성공해 사마의는 위나라를 점령하고 서진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사마의는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고 아들들에게 서진을 넘겨주었다. 만약 다른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직접 제압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251년 사마의는 7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아들 사마소는 서진 나라를 수립했고 촉나라를 멸망시켰다. 사마염이 오나라까지 정벌한다. 서진이 천하통일을 이룬다. 사마염은 서진의 천하통일 이후 고조 선황제로 사마의를 추대한다. 이로써 사마의는 삼국 통일왕조의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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