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160회
'붕괴된 소련을 삼킨 거대 재벌! 올리가르히'
| 강대국 소련은 왜 몰락하였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인 소련은 지구상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했다.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로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 있었다. 무상 교육 실시하고 졸업 후에는 일자리까지 제공되었다. 기본 식료품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었고 그밖에 필요한 것은 국영상점에서 싸게 구매 가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소련의 사회보장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경제 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행정 명령 경제 체제
정부와 당이 기업을 소유하고 가격을 정하며 생산량을 결정하는 체제
정부의 사업 통제로 소련에 경제 침체기가 찾아온 것이다. 소련이 경기 침체에 시달리던 1985년 최연소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선 인물이 바로 고르바초프*이다.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최고 지도자이자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정치가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오르자마자 소련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소련의 낡은 체제와 시스템을 바꾸는 개혁의 칼을 빼 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의도는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러시아에는 식당, 학원, 자동차 수리점 등 개인이 운영하는 상점들이 생겼고 소련의 변혁기에 시류에 빨리 올라탄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터득했다.
고르바초프는 몰타회담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속된 냉전을 종식시켰다.
Q. 냉전 종식 후, 모스크바에 처음 문을 연 이곳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는데요. 이곳은 어디일까요?
맥도날드
이 시기에 밀수품을 암시장으로 장사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러시아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였다.
올리가르히
소련에 속한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자들
|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성공? 실패?
자율적 경영을 시작한 국영 기업의 부정부패가 심각했고 올리가르히는 러시아 신흥 재벌은 소련 내 물품을 외국에 비싼 값에 판매했다. 개혁 정팩의 부작용으로 기업의 부정부패를 부치긴 상황이 되면서 결국 국가 재정까지 바닥나는 위기에 봉착했다.
소련 시민들은 식료품 배급의 양이 줄어들자 마트 안은 경쟁 그 자체였다. 물가가 폭등하면서 소련 시민들은 더욱 빈곤해졌다. 결국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서는 '개혁 반대'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공산당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들을 자율에 맡기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르바초프는 개혁 의지를 꺾지 않고 파격적인 정치 변화를 시도했다.
| 소련 최초 대통령제 도입! 연방 붕괴의 시작?
1989년 정책을 폐기하는데 바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공산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고 독자 행동을 못 하게 무력으로 막을 수 있다는 원칙
소련은 연방의 이탈을 막기 위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펼쳐왔는데 이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각 공화국들은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 뻔했다.
1990년 대통령제가 소련 의회에 도입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이 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연방들이 독립을 요구하면서 소련을 붕괴 위기로 몰아넣었다.
Q. 휴가를 즐기던 고르바초프는 갑자기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맞게 되는데요. 무슨 일을 당했을까요?
쿠데타 세력은 대통령을 무례하게 부르며 부통령에게 직위를 넘기라고 협박
부통령을 중심으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한 쿠데타 세력은 기자회견을 한 후 국가 계엄령을 선포한다. 군부를 모스크바 시내에 집결시키고 주요 시설들까지 장악했다.
쿠데타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이 있었는데 보리스 옐친*이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급진적인 개혁 논리를 주장한 인물
옐친은 공산당을 복원하려는 쿠데타 세력에 반대해 거리로 나서게 된다. 옐친은 쿠데타를 비난하며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노력한다. 이에 동참한 시민들은 모스크바 시내에서 시위를 하며 쿠데타에 분노를 표출한다.
쿠데타 세력은 단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이 일로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 고르바초프 vs 옐친의 권력 싸움!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옐친은 소련 체제를 해체하고 러시아를 자유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옐친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서 러시아에 군림하려 했다.
연방국들이 독립하면서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공식 해체되고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내려놓는다. 소련 붕괴 후 옐친은 러시아 연방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다.
| 옐친 정권의 파격 개혁! '충격 요법'
옐친 정부는 소련 해체 후 약 보름 만에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자율화했다.
1994년 러시아 소비자 물가는 충격 요법이 시행되기 이전보다 580배나 상승했다. 당시 소시지 1kg 가격이 근로자 평균 월급의 3배였다.
이러한 급격한 물가 상승은 루블화 가치의 대폭락을 가져왔다. 옐친 정부는 개혁 개방의 부작용을 보완할 제도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올리가르히는 어떻게 러시아의 부를 장악했을까?
① 시장 혼란 이용
당시에는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해 은행을 세우는데 돈이 별로 들지 않았다. 올리가르히는 적은 자본을 들여 은행을 세웠는데 이들이 세운 은행의 수는 약 1,400개에 달했다.
옐친 정부는 은행 감독에 손을 놓고 있었고 올리가르히는 이틈을 타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사람들을 속이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다. 당시에는 연평균 은행 이자율은 7%였고 매월 물가상승률은 25%로 은행에 돈을 저축하면 손해였지만 올리가르히는 사람들을 속여 은행에 돈을 저축하게 만들었다.
당시 민간 은행은 국가의 돈을 위탁받은 기능을 했는데 올리가르히는 고위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해당 부처의 자산을 관리하는 계좌를 자신의 은행에 만들게 했다. 이렇게 정부의 예산으로 큰돈을 번 대표적인 올리가르히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이다.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러시아 민영방송 NTV를 비롯한 언론, 금융 등을 아우르는 모스트 그룹을 세운 미디어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모스크바 시장과의 친분으로 시장 운영 자금을 모두 자신의 은행에서 관리하게 했고 그 돈으로 해외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건설회사를 설립해 시장과의 친분으로 모스크바의 수많은 공사를 수주했다.
② 국영기업 독식
옐친 정부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는데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엘친은 민영화 시장에 나온 국영 중소기업들의 주식을 구매할 수 있는 바우처를 배포했다. 옐친은 바우처를 통해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고 공기업 민영화의 지지를 받고자 했다.
주식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러시아의 국민들은 바우처로 당장 필요한 생필품이나 보드카 몇 병에 팔아버렸다. 올리가르히는 바우처를 많이 모으면 국영 중소기업을 소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바우처를 사 모았다.
국영 중소기업을 사들인 올리가르히는 금융, 석유, 통신, 미디어 등 거대 국영기업까지 탐내기 시작한다. 옐친 정부는 중소 국영 기업도 민영화했으니 이번엔 거대 국영 기업 민영화도 준비하고 있었다.
Q. 올리가르히는 옐친 정부에게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는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요. 무엇일까요?
올리가르히의 검은 계획 '주식 담보 대출 경매'
정부가 돈을 갚지 못하면 국영 기업 지분을 경매로 매각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옐친은 술에 취해 국정을 소홀히 돌봐 올리가르히가 기업을 독식하도록 방관한 셈이었다.
| 흔들리는 옐친! 올리가르히의 선택은?
1996년 대통령 재선을 노리고 있었던 옐친의 지지율은 8%였다. 옐친의 문제는 지지율과 더불어 술에 있었다. 옐친은 술에 위채 공식 일정에서 러시아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옐친은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다.
소련 붕괴 후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공산당원들은 기회를 포착한다. 옐친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시민들은 1995년 12월 선거에서 공산당을 1당으로 만들었고 옐친 정부의 여당은 3당을 자치했다.
공산당이 1당을 차지하자 공산당 대표 주가노프가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옐친과 한 몸이었던 올리가르히는 무조건 옐친의 재선을 성공시켜야 했다.
③ 대선 개입
올리가르히 7인방의 재산을 다 합치면 러시아 자산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올리가르히 7인방은 자신들이 소유한 언론사를 통해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1. 미디어를 통제하라!
이들이 소유한 언론사에서는 매일 같이 옐친을 찬양하는 뉴스가 도배되었다. 동시에 상대방을 비방하는 네거티브 전략도 사용하였다.
2. 최고의 킹 베이커를 섭외
마가렛 대처 3선의 주역인 영국 홍보팀과 미국 이미지 컨설턴트를 섭외했다.
Q. 옐친은 러시아 젊은 세대의 표까지 끌어오기 위해 이 사람을 활용하는데요, 누구일까요?
힙합 가수 말치슈닉 활용 '투표하거나 패배하거나' 노래
러시아 대통령 선거 제도
1차 선거에서 득표수 50%를 넘은 후보자가 없을 시에는 상위 득표자 2인으로 2차 선거를 진행한다.
1996년 6월 16일 대통령 선거 결과 옐친 35.32%, 주가노프 32.03%, 레베드 14.52%를 기록했다. 50%를 넘는 후보자가 없어 다시 투표를 해야 하는데 옐친은 3위인 레베드를 안전회의 서기장으로 임명해 3위 후보의 지지율을 흡수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런데 2차 선거 일주일 전 옐친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다. 이를 감추기 위해 올리가르히의 능력이 총동원된다. 옐친과 인터뷰 한 척 조작 기사를 내보내고 병원에 있던 옐친 주변 의료기기를 치우고 안 아픈 척 인터뷰해서 방송에 내보냈다.
1996년 7월 3일 2차 선거 결과는 옐친 53.82%, 주가노프 40.31%로 옐친은 재선에 성공한다. 올리가르히는 옐친의 도움으로 국영 기업을 소유했고 면세 혜택까지 얻어 세금을 내지 않았다.
| 러시아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 몰락의 시작?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올리가르히에게도 타격을 입게 된다. 1999년에는 경제 정책 실패와 건강 악화로 옐친이 사임을 발표한다. 올리가르히가 꼭두각시가 되어줄 옐친의 후임으로 찾은 인물은 현재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었다.
당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시장으로 정치가에서는 영향력이 없던 인물이었다. 올리가르히는 푸틴이라면 영향력이 없으니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2000년 올리가르히의 도움으로 푸틴이 대통령이 된다. 푸틴이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올리가르히를 척결하는 일이었다.
당시 푸틴은 러시아 경제를 되살리고 사회 안정화를 위해서 올리가르히의 부정부패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푸틴의 등장! 올리가르히의 운명은?
푸틴은 정치권을 넘보지 않으면 돈을 버는 것은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 반발한 세력부터 척결했다. 푸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베레좁스키는 탈세 등 여러 가지 혐의로 구속되었고 소유하고 있던 석유 회사는 나라에 넘겨야 했다. 2001년에 현재가치 약 3조 원의 재산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망명한다.
망명 후에도 베레좁스키는 재계가 힘을 모아 푸틴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러시아의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투사라고 했다. 2013년에 베레좁스키는 우울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구신스키는 푸틴의 대통령 당선 두 달 후인 2000년 5월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구신스키는 소유한 회사를 나라에 넘기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호도르콥스키는 2003년 사기, 횡령, 탈세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세금 체납을 이유로 어마어마한 추징금이 부과되었다. 결국 파산한 호도르콥스키의 회사는 국영 기업으로 넘어갔다. 호도르콥스키는 푸틴과 같은 범죄자들과 타협할 바에는 감옥에서 썩겠다고 했고 실제 징역형을 받아 시베리아 감옥에서 8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에는 영국으로 망명해 푸틴의 정적으로 활약 중이다.
포타닌은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아이콘이 되었다. 프리드만과 아벤은 푸틴의 최측근이 되었다. 스몰렌스키는 1998년 금융위기에 회생을 하지 못해 부자 순위에서 밀려났다.
올리가르히 7인방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푸틴은 올리가르히 길들이기로 러시아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올리가르히 1세대가 막을 내렸다.
| 2세대 러시아 신흥 재벌의 등장
러시아의 이인자로 불리는 이고르 세친은 푸틴과 동향에 푸틴 정권의 부총리였다. 그는 푸틴의 도움으로 석유회사 로스네프트 국영 석유회사의 CEO가 되고 러시아 에너지 사업을 주도한다.
푸틴의 죽마고우 아르카디 로텐베르크는 건설회사 스트로이가스몬타슈를 운영하여 2세대 올리가르히로 떠올랐다. 그는 당시 30억 달러 (당시 가치 약 3조 5천억 원)의 크림 대교 교량 건설 사업을 차지했다. 정부 사업을 독점하면서 승승장구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올리가르히가 장악하고 있다.
재미있게 보셨다면
구독 부탁드려요
* 인용된 사진과 문구는 해당 방송국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