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세계사 167회
'로마 황제를 꿈꾼 파시스트 무솔리니'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동부 로마니아 지방의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무솔리니가 태어난다. 무솔리니는 어렸을 때부터 폭력성이 있었는데 6살 때 친구를 돌멩이로 폭행해 피투성이로 만들었었다.
무솔리니는 친구들에게만 폭력을 보인게 아니었는데 교사에세 혼이 나면 잉크병을 던지기도 했다. 1894년 11월 학교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는데 싸우다가 친구를 주머니 칼로 찔렀다. 무솔리니는 평소에 주머니 칼을 들고 다니다 친구와 싸우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이일로 무솔리니는 퇴학을 당하고 새 학교로 전학을 갔다.
무솔리니는 새 학교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학을 당하는데 또 다시 친구를 칼로 찔렀기 때문이다.
Q. 우등생이었던 무솔리니가 학교 졸업 후 선택한 작업은 무엇일까요?
1901년 18세 고등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을 시작
무솔리니는 폭언과 체벌은 물론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고 지키지 않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근무하던 학교에서 교사 생활 1년 만에 쫓겨난다.
1902년 19세였던 무솔리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로잔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에 빠진다.
사회주의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사상
사유재산을 없애고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이념
무솔리니는 사회당 주간지 및 사회당 지역 신문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며 민주주의, 중산층 그리고 교회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빼앗으려는 전쟁에 들어서자 무솔리니는 전쟁에 참전한 노동자들은 고통을 얻고 자본가들만 이익을 얻는다며 전쟁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탈리아-리비아 전쟁(1911~1912)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리비아를 빼앗기 위해 이탈리아가 일으킨 전쟁
무솔리니는 파업을 유도했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져 5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무솔리니는 지명도를 얻었고 사회당 신문 [아반티]의 편집장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매스미디어로 대중을 선동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동맹국 | VS | 연합국 |
오스티리아, 독일, 튀르크, 불가리아 |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영국, 일본, 미국 |
이 때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절대 중립을 지켜야한다고 신문에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두달 뒤 무솔리니는 참전을 독려하는 글을 쓴다. 무솔리니는 전쟁에 참전해 승리하면 이탈리아가 국제적 위상을 얻고 영토 확장을 통해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큰 이유는 무솔리니 본인이 참전운동을 기회로 정치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반대했다가 찬성했던 이 논란으로 사회당 신문 편집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회당에서 배척당한 무솔리니는 이에 대적하기 위해 민족주의자로 변신한다.
1915년 5월 24일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는 참전을 결정한다. 이탈리아가 연합국과 비밀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런던조약
연합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승전 시 이탈리아에 전쟁 배상금과 남부 티롤을 비롯해 영토 지급을 약속
비밀 협정을 맺은 이탈리아는 50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1918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다.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다.
이탈리아는 연합국으로부터 푸대접을 받는데 약속했던 배상금은 전혀 받지 못했고 영토도 일부만 지급 받는다. 65만 명이 넘는 군인이 전사하며 얻어낸 푸대접 보상에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반감이 급증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켜 국가의 통합과 강화를 약속한다. 무솔리니의 사이다 같은 말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이때부터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만들어 전파하기 시작한다.
파시즘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
1919년 3월 23일 이탈리아 전투 동맹을 결성하고 파시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밀라노를 첫 거점으로 선택한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검은 셔츠단
베니토 무솔리니가 창설한 군사 조직이자 정치깡패 집단, 검은 셔츠를 단복으로 활용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과 함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검은 셔츠단은 무솔리니가 편집장으로 일했던 [아반티] 신문사를 습격하고 파시즘을 반대하면 무조건 공격했다. 집회를 공격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렀다.
사회주의 때문에 재산을 뺏기는 것이 두려운 중산층과 상류계층이 파시즘을 지지했다. 검은 셔츠단은 점점 인기가 많아져 200명으로 시작한 단체는 불과 2년 뒤 8만 4백여 명까지 늘어났다.
급속도로 세력을 키운 무솔리니는 1921년 11월 7일 국가 파시스트당을 만든다. 로마 제국을 재현하겠다는 국가 파시스트당의 정체성 확립한다.
무솔리니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테러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한다. 전국에서 모여든 검은 셔츠단 6만여 명은 로마로 모여들었다. 당시 로마 국왕은 계엄령을 내리는 대신 무솔리니와 타협을 선택한다. 단기간에 민심을 얻은 무솔리니를 적으로 돌리기보단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마에 입성한 39살 무솔리니에게 국왕은 총리 자리를 주었다.
Q. 로마진군 당시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이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무엇일까요?
로마 진군이 실패할 경우 해외 망명을 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무솔리니 독재 이후에도 비밀에 부쳐졌던 사실이다. 1922년 10월 30일 무솔리니 내각이 출범한다. 세계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국가가 탄생한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일당으로 만들기 위해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법을 개정한다. 개정한 선거법은 선거에서 1등한 정당이 국회 의석 2/3을 확보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되면 원하는 법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선거법 개정 후 1924년 4월 무솔리니가 41세가 되던 해 총선을 치르게 되는데 검은 셔츠단은 투표인 명부 조작과 투표함 바꿔치기 등 투표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총선 결과는 총 535석 중 파시스트당이 355석을 차지했다.
자코모 마테오티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1919년 이탈리아 사회당 국회의원 당선
마테오티는 무솔리니가 개정한 새 선거법과 부정선거를 비판했다. 그는 의회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격렬한 연설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테오티가 길 한복판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납치 후 몇 주 뒤 마테오티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범인들은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이었고 무솔리니의 공보 비서관이 마테오티 암살을 명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는데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의회 시정연설에서 독재를 선언한다. 무솔리니는 독재를 위해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모든 정당과 단체들을 불법화하고 폐쇄시킨다. 그리고 MVSN(국가 안보 자경단)이라는 무장 조직을 창단한다.
MVSN은 검은 셔츠단이 이름만 바꾼 단체로 음지에서 활동하던 조직은 공권력이라는 날개를 달고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무솔리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파시스트당만을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만들며 자신을 수령이라는 뜻의 두체(Duce)로 자신을 부르게 했다.
무솔리니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여러번있었다.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무솔리니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반파시스트 인사들을 대규모로 체포한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독재에 대한 반대가 사라지게 되는데..
1929년 5월 또 한 번의 총선을 치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총 400석 중 파시스트당이 400석을 차지한다. 이때 선거는 파시스트당 외에 모든 당을 불법으로 해산시켰다.
무솔리니는 46살에 완벽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무솔리니는 본격적으로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다양한 계획을 실행한다.
# 무솔리니의 로마 제국 부활 프로젝트
① 로마 제국 유적 복원
고대 로마 제국의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프로젝트이다.
제 계획은 명확하고 제 지시는 구체적입니다. 5년 후, 로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경이롭게 보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넓고, 질서 정연하며, 강력해야 합니다.
무솔리니는 다양한 고대 로마 유적을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복원하기 시작했다. 로마 복원 사업은 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적 건축물을 파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복원 과정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건축물들을 무자비하게 철거 및 훼손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역사적 진실성과 가치를 훼손했다.
② 로마 제국 지도자 따라 하기
무솔리니는 쟁기 대신 트랙터를 운전해 로물루스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로마의 전설적인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국민들과 동 떨어진 권력자가 아닌 함께하는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했다. 무솔리니의 선전·산동 방법은 많은 독재자들이 따라했다.
Q. 무솔리니는 특히 이미를 통한 선전 방법에 적극적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문맹률이 높았는데 무솔리니는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 이미지를 통한 선전 활동에 집중했다.
무솔리니는 폐업직전에 놓인 영화사를 인수해 선전·기록 영화 제적 기관 '루체'를 만들어 선전도구로 활용했다.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는 무솔리니 후원으로 탄생했다. 당시에는 최고의 영화는 무솔리니 컵을 상으로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2년 무솔리니컵은 폐지되고 황금사자상으로 대체되었다.
무솔리니는 영화를 통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이탈리아 사람들을 선동했다.
③ 로마 제국 영토 회복
무솔리니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차지한 옛 카르타고 회복을 선언한다. 스파치오 비탈레라는 영토 확장 정책을 시작한다.
스파치오 비탈레
이탈리아어로 생존권을 의미
이탈리아 파시즘의 주요 팽창 정책으로 옛 로마 제국으로 회귀하려는 계획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대륙 침공을 계획하는데 첫 번째 전쟁국은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어피아는 이탈리아에 전쟁의 패배를 안겨주면서 이탈리아에 유럽 국가 중에 아프리카에 패배한 국가라는 오명을 안겨주었다.
무솔리니는 전쟁에서 패배한 선조들의 굴욕을 만회했다는 것을 과시하려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면 수에즈 운하를 통해 갈 수 있는 대규모 식민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35년 10월 로마 베니치아 궁전 발코니에서 에티오피아 침공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이탈리아 VS 에티오피아 전력 비교》
구분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 |
군인 | 51만 7천 명 | 50만 명 |
전차 | 250대 | 전차 4대, 장갑차 7대 |
항공기 | 350기 | 13기 |
1935년 10월 3일 새벽 5시 이탈리아 군대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이탈리아의 총공세에 에티오피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무솔리니는 40년 전 패전을 설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전장에 도달한 이탈리아 군인은 50도에 달하는 무더위와 갈증과 싸우며 흙먼지 날리는 산길 행군에 진격이 느려졌다.
Q. 위기에 처한 무솔리니가 극단의 처방으로 생각한 이것은 무엇일까요?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살상무기 독가스는 전쟁이 끝나고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무솔리니는 악명 높은 겨자 가스를 폭격기에 실어 에티오피아에 투하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탈리아군은 약 500톤에 달하는 겨자 가스를 살포했다. 에티오피아인 1만 4천 명에서 최대 5만 명이 죽거나 중독된 것으로 추산된다.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은 마침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전쟁에서 승리한다.
국제 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탄하고 경제 제배를 가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대대적인 금모으기 운동을 벌인다. 금을 국가에 헌납하면 조국의 금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철제 반지와 증명서를 받았다.
# 국제 연맹의 제재 조치
- 이탈리아로 무기 수출 금지
- 특정 원자재 거래 제한
- 금융 거래 제한
1937년 무솔리니는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다. 이탈리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게 된다. 이탈리아에게 손을 내민 국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되기 전부터 무솔리니를 동경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는 것을 본 무솔리니는 히틀러와의 동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1939년 5월 22일 이탈리아와 독일은 강철 조약을 체결한다.
[ 강철 조약의 내용 ]
1. 이탈리아와 독일은 서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유와 독립을 존중하고, 서로의 영토와 영향권을 침범하지 않는다.
2. 제3국에 공격당할 경우에는 즉시 서로에서 통보하고, 최대한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
1940년 6월 10일 당시 무솔리니는 57세였는데 갑자기 입장을 바꾼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고 선포한다.
Q. 참전에 동의하지 않던 무솔리니는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꿨을까요?
어떻게든 숟가락을 얹어 승전국에 끼려한 무솔리니
히틀러는 도와달라고 할 때는 전쟁에 참전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며 선긋더니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제와서 전쟁에 참전하는 무솔리니를 보고 분노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마음도 모르고 전리품을 기대했는데 쓸모없는 알프스 지역의 작은 땅을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고 무솔리니는 이집트를 침공하기로 한다.
《이탈리아 VS 이집트 전력 비교》
구분 | 이탈리아 | 이집트(영국군) |
군인 | 15만 명 | 약 4만 명 |
전차 | 600여 대 | 200여 대 |
항공기 | 347기 | 200여 기 |
이집트를 공격하는 이탈리아를 본 히틀러는 군대를 내어 도와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거절한다.
무솔리니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않았는데 1940년 10월 그리스 침공을 결정한다.
Q. 무솔리니가 무리하게 10월 28일 그리스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8년 전 로마로 진군해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날이었기 때문
《이탈리아 VS 그리스 전력 비교》
구분 | 이탈리아 | 그리스(발칸) |
군인 | 56만 5천 명 | 30만 명 |
소형 전차 | 136여 대 | 0대 |
전투기 | 436기 | 160여 기 |
무솔리니의 군대는 호기롭게 그리스를 침공하는데 고전을 하게 된다. 그리스는 산악 지형이 많아 전차가 많아도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10월 28일 고집해서 기상 악화로 작전 수행이 어려웠다.
그리스군은 익숙한 산악 지형을 활용해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심지어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영토를 25% 차지했다.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에서 항복한다.
그리스전에서 참패한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6개월 동안 쩔쩔매던 전쟁은 독일군이 개입하고 3주 만에 아테네까지 함락시켰다.
1940년 12월 9일 이집트에 있던 영국군은 이탈리아를 향해 반격을 시작한다. 영국군에 밀린 무솔리니는 다시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 장군을 파견한다.
에르빈 롬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가장 유명한 독일군 원수 중 한 명으로 프랑스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다.
히틀러의 지원에도 이탈리아는 이집트에 패배한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 전쟁을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또 승전국이 되기 위해 20만 명의 군사를 자진해서 파견한다. 소련으로 보내진 이탈리아 병사들은 방패막이 역할로 쓰이다 죽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로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미국이 참전한 연합국은 추축국에서 이탈리아를 탈퇴시킨 뒤 독일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연합국은 이탈리아 상륙작전에 돌입한다. 불리한 상황에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이탈리아 병사들은 쉽게 투항했다.
무솔리니 60세에 로마가 폭격을 맞는 걸 보게 되는데 그때 투하된 폭탄이 9,125개였다. 이때 투하된 푹탄에 민간인 1,500여 명이 사망했다.
무솔리니는 1943년 7월 25일 자신의 총리직 해임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 무솔리니를 끌어내린 건 파시스트당의 지도자들이었다.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파시스트당 지도자들은 무솔리니를 재물로 삼고 전쟁 책임을 돌린 뒤 협상도구로 삼으려 했다.
무솔리니는 21년 만에 국왕으로 부터 해임 통보를 받는다. 무솔리니는 해임 통보를 듣자마자 체포 후 구금된다.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탈퇴한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구출하라고 명령한다.
- 지중해를 맡을 만한 지도자가 무솔리니 밖에 없었다.
- 히틀러가 선전 활동을 할 때 무솔리니를 파트너로 대우했기 때문에 자신이 해왔던 행동을 쉽게 뒤집을 수 없었다.
1943년 9월 13일 무솔리니 구출 작전을 실시하는데 결국 성공한다. 이후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지령으로 파시스트 공화국을 수립하고 지도자로 앉게 된다. 연합국의 기세가 높아지면서 파시스트 공화국의 패색도 짙어진다.
62세의 무솔리니는 패배를 직감하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스위스로 탈출을 계획한다. 그러다 이탈리아 비정규군 요원 파르티잔에 붙잡힌다. 무솔리니와 애인은 붙잡힌 다음 날 총살되었고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졌다.
무솔리니와 애인의 시신은 주유소에 매달리게 되는데 당시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도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다. 두 독재자 사망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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