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159회
'프랑스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루이 15세의 여자들'
| 절대 왕정 시대를 꽃피운 도시 '프랑스 베르사유'
베르사유를 기반으로 프랑스의 절대 왕정 시대를 꽃피운 인물은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이다.
루이 14세 (재위 1643년 ~ 1715년)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3대 왕으로 72년간 재위한 유럽의 군주 중 최장기 집권자
루이 14세는 절대 왕정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귀족들을 굴복시키기로 한다. 그 방법으로 결혼계약서나 재산 등록 등으로 귀족의 신분을 증명하게 했다. 하지만 서류로 자신이 귀족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그렇게 줄어든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루이 14세에게 엎드려야 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발아래 두기 위해 1683년 왕궁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이전하면서 귀족들을 베르사유로 불러들여 서열화를 했다.
루이 14세를 왕위를 물려줘야 될 때가 왔는데 아들과 손자가 사망한다. 그렇게 루이 14세의 유일한 후계자는 증손자 루이 15세가 된다.
1715년 태양왕의 후예 루이 15세가 5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루이 15세가 너무 어려서 루이 14세 조카 오를레앙 공작이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된다.
루이 15세가 성인의 나이 13살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는 루이 14세가 물려준 빚이 많았는데 재위 72년 동안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이름을 유럽에 떨치기 위해 전쟁이 많이 치렀고 그렇게 쌓인 빚이 현재 가치로 약 50조 원이나 됐다.
플뢰리 추기경
프랑스 왕국의 성직자, 정치인
루이 15세 시절의 수석대신
플뢰리는 루이 15세 대신 프랑스를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수석대신에 오른 지 13년 만에 나라의 빚을 청산하고 약 2,540억 원을 흑자로 전환한다.
루이 15세와 결혼한 인물을 보고 사람들을 의아함을 느꼈다. 15살의 루이 15세는 7살 연상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마리아 레슈친스카
프랑스 왕국 루이 15세의 왕비
폴란드 왕족 출신
Q. 루이 15세가 마리아 왕비와 결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리아 왕비가 다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
초반이 금실이 좋았던 부부는 12년 동안 10명의 아이를 출산했다. 국정도 안정적이고 후자도 10명이나 있던 루이 15세는 대놓고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 프랑스 절대 왕정의 파멸을 이끈 스캔들의 시작
루이 15세의 첫 번째 스캔들 상대는 부인의 시중을 들었던 루이즈 줄리 드 마이넬이었다. 유부녀인 루이즈와의 관계를 위한 루이 15세의 선택은 공식정부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루이즈를 공식정부로 임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이 15세는 두 번째 애인 폴린 펠리시테를 만난다. 당시 29살의 루이 15세는 27살의 폴린과 금세 사랑에 빠진다.
Q. 루이 15세와 폴린의 만남은 프랑스를 충격에 빠뜨렸는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루이즈의 두 살 아래 친동생
# 프랑스 절대 왕정을 뒤흔든 루이 15세의 여자들
① 마이넬 가문의 자매들
루이 15세는 사랑하는 폴린을 위해 슈아지 르 루아성을 지어서 건물주로 만들어주었다. 그녀가 루이 15세의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파리의 여론은 폴린을 비난하며 루이 15세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폴린 사망하자 루이 15세는 곧바로 스캔들이 터졌는데 상대는 마이넬 가문의 셋째 딸 디안이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마이넬 가문의 다섯 번째 딸 마리안느와 스캔들이 터진다.
마리안느는 언니들과 똑같은 절차를 겪지 않기 위해 루이 15세에게 공식 정부 자리를 요구한다. 그리고 공작부인 칭호를 요구한다. 루이 15세는 공식정부인 루이즈를 궁 밖으로 내보내고 공식정부에 마리안느를 선포한다. 그리고 공작부인의 칭호를 내리고 연 13억 원에 달하는 돈을 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부터 유럽 내 강대국들이 진영을 나누어 8년여간 벌어진 전쟁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위 계승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반발하며 전쟁을 발발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13~20세기 초까지 약 600년간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으로 프랑스 왕가의 가장 큰 라이벌
합스부르크 가문과 숙적이었던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지원했고 반대로 프랑스와 숙적이었던 영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했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루이 15세가 갑자기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하는데 이유는 프랑스의 국정을 운영하던 플뢰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Q.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한 루이 15세는 이 행동으로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데요. 어떤 행동이었을까요? 마리안느뿐만 아니라 언니 디안까지 전장에 데리고 간 루이 15세
전장에서 갑자기 병에 걸린 루이 15세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는데 성직자들은 루이 15세가 병에 걸린 것은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를 들은 루이 15세는 정부들과의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그녀들을 궁에서 쫓아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무승부로 끝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를 인정받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역을 획득하게 된다.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는 이득도 없이 재정만 적자상태가 된다.
② 퐁파두르 후작 부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귀족 출신이 아닌 부르주아 출신의 평민이었다. 잔느의 어머니는 점술가로부터 왕의 여자가 될 상이라는 말을 듣고 다른 부르주아의 도움을 받아 잔느를 교육시켰다.
루이 15세가 사냥을 하던 장소에 나타난 잔느는 미모를 뽐내며 얼굴 도장을 찍고 가면무도회에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루이 15세 마음에 들게 된다. 그렇게 루이 15세는 공식정부의 자리를 잔느에게 준다.
공식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고위 귀족의 부인이 소개해주는 절차가 있었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여성이 귀족 출신이어야 했다.
데뷔탕트
성년에 이른 귀족의 여성을 사교계에 소개하는 행사
루이 15세는 귀족 가문의 지위를 돈으로 사서 잔느를 귀족으로 만들었다.
- 퐁파두르는 어떻게 루이 15세를 사로잡았나?
1. 외모관리
2. 문화의 예술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대세 문화로 자리 잡은 '로코코 양식'
Q. 퐁파두르 부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문제점을 파악해 파리에 이것 설립에 앞장서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프랑스의 사관학교
퐁파두르는 선물로 부동산을 좋아했는데 정부로서 받는 돈도 성과 저택을 사들이는 데 사용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퐁파두르 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15세는 국민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고 퐁파도르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31살의 퐁파두르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루이 15세와 잠자리를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녀가 선택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3. 침실 권력의 배후
Q. 퐁파두르 부인은 왕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사슴 정원이라는 곳을 운영하는데요. 이곳은 어떤 곳일까요?
본인 대신 루이 15세와 하룻밤을 보낼 여성들을 모은 매춘부 양성소
사슴 정원에 모인 여성들은 13~14살의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성들이었다. 퐁파두르가 어린 여성을 선택한 이유는 성경험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로 인해 루이 15세가 병에 걸릴 염려가 적다고 판단했다. 여성들에게 기본적인 글과 그림, 음악, 춤, 궁정 예절을 교육하고 매일밤 그중 한 명을 루이 15세에게 데려갔다.
퐁파두르는 사슴 정원에 하층민 출신으로 돈이 절실한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루이 15세는 사슴 정원에 250억 원을 낭비하며 사슴 정원을 즐겼다.
| 퐁파두르의 측근 정치와 국정 농단
퐁파두르는 충성심을 기준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주요 요직에 발탁했다. 퐁파두르는 프랑스에 위협이 되는 선택을 하는데 바로 7년 전쟁이다.
7년 전쟁 (1756~176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해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오랜 앙숙이고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동맹국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는데 오스트리아는 퐁파두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퐁파두르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퐁파두르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굉장히 싫어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퐁파두르를 향해 속옷의 여왕이라고 조롱을 했으며 자신의 애완견에게 퐁파두르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은밀하게 접속한 퐁파두르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향락에 빠진 루이 15세는 국정운영에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상태였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프랑스는 심지어 많은 식민지까지 영국에 빼앗기게 된다.
1762년 평화조약으로 전쟁은 종식됐지만 루이 15세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7년 전쟁 빚만 약 42조 원에 달했다. 결국 퐁파두르가 프랑스 외교를 장악하면서 프랑스에 재정악화를 안겨주었다.
여자에게 휘둘려 전쟁까지 패한 루이 15세를 향해 프랑스인들은 분노를 쏟아내었다. 1757년 파리에서 루이 15세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당시 루이 15세가 두꺼운 모피를 입고 있어 가벼운 상처만 남겼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곁에 계속 둔다.
퐁파두르는 7년 전쟁의 실패와 날카로운 민심에 쇠약해져 갔고 1764년 4월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의 죽음으로 모든 의욕을 상실했지만 프랑스 왕실은 루이 15세에게 새로운 애첩을 소개하기 바빴다.
③ 잔 뒤 바리
잔 뒤 바리는 프랑스 왕실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인물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잔 뒤 바리는 하녀였던 어머니 아래 태어나 성인이 되자 다양한 일로 돈을 벌었는데 그때 그녀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장 바티스트 뒤 바리(고위직 귀족 매춘 알선가) 백작은 돈이 필요했던 잔 뒤 바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잠자리 기술을 알려주고 매춘을 시작했다.
퐁파두르가 사망하자 백작은 권력을 위해 잔 뒤 바리를 루이 15세에게 소개했다. 당시 루이 15세가 58살이고 잔 뒤 바리는 25살이었다.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반해 공식정부 자리에 그녀를 앉힌다.
| 잔 뒤 바리가 불러온 왕실 가족 간의 불화
루이 15세의 딸들은 공식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와 결혼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프랑스 왕실 여성 최고 서열
마리아 왕비의 죽음 이후 왕세자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주들의 말에 휘둘려 잔 뒤 바리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vs 잔 뒤 바리
왕실 최고 여성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화를 걸기 전까지 말을 걸 수 없었던 잔 뒤 바리는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결국 루이 15세는 잔 뒤 바리를 위해 직접 나서게 된다.
루이 15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잔 뒤 바리 부인에게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충고한다.
어머니의 설득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잔 뒤 바리에게 말을 걸게 된다.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는 잔 뒤 바리는 사치를 부렸는데 루이 15세는 왕족 전용인 흰색과 금색 인테리어를 잔 뒤 바리에게 허락했다. 6년 동안 잔 뒤 바리가 사치에 쓴 금액만 현재 가치로 약 2,132억 원이다.
잔 뒤 바리의 사치에 프랑스는 한 해에만 약 6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결국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파탄이 난다. 결국 루이 15세는 왕실 내 불화와 재정난으로 프랑스인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1774년 천연두를 앓던 루이 15세는 6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잔 뒤 바리는 베르사유를 떠난 후 사치품으로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누린다.
왕실에 분노하던 프랑스인들은 결국 1789년 대대적인 혁명을 일으킨다.
프랑스 대혁명
구체제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왕정의 무능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며 왕정이 붕괴되고 자유의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시킨 혁명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잔 뒤 바리마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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